20세기 초 금강산의 재가여성수행자들, 이들이 떠난 자리를 차지한 ‘금강산 팔선녀’ – 글: 전영숙

글: 전영숙(샤카디타 코리아 운영위원)

분단 이전까지 금강산은 수행자들의 성소(聖所)였다. 불교의 큰 도인스님들 가운데 금강산에서 수행하지 않았던 스님을 알기 어려울 정도이며, 조선의 유학자들도 알게 모르게 금강산을 찾았다. 비구니스님도 예외는 아니어서 20세기 초부터 분단 직전까지 전설적 비구니 도인스님들의 금강산 수행 일화들이 전해온다. 비구니문중 이름 중에도 금강산에서 유래한 예들이 있음을 앞 호에서 소개한 바 있다.

이번 호에는 재가여성 가운데 금강산에서 수행했던 두 명의 수행자를 소개한다. 한 분은 대한민국 불모(佛母)로 추앙받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佛畵匠) 비구 석정(石鼎,1928~2012) 스님의 어머니 이춘봉(李春鳳, 1890~1947)보살님이고, 다른 한 분은 내무부장관, 동국대 총장을 역임하고 활불이라 불린 백성욱(白性郁, 1897~1981) 박사의 정신적 스승 혜정 손석재(慧亭 孫昔哉, 1882~1959) 보살님이다. 마지막으로 분단 이후, 북한 정부가 이런 여성수행자들이 떠난 자리를 무엇으로 대체해 왔는지를 2008년 평양시네마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금강산 팔선녀(영문명 THE ENCHANTED MOUNTAIN)」를 통해서 살펴본다. 이렇게 해서 남한불자의 ‘상상 속 금강산’과 오늘날 ‘북한주민의 금강산 이미지’를 비교해 보면 좋을 것 같다. 한편 「금강산 팔선녀」는 2020년 제2회 평창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으며 현재 유튜브를 통해서 한국어본과 영어본을 다 감상할 수 있는 바, 아래 <참고자료>란에 링크를 걸어놓겠다.

공산화에도 금강산에 남은 이춘봉 보살님

이춘봉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남녀평등과 여권신장에 앞장서고 서양종교를 믿던 신여성이었다. 젊어서 이춘봉은 결혼에는 뜻이 없었기에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28세 되던 1917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졸업 후 3년간 산부인과에서 간호사 생활을 했다. 그런데 일찍 작고한 생모에 이어 형제자매가 계속해서 사망하는 슬픔을 당하자 이춘봉은 마음의 문을 닫고 혼자 외롭게 지낸다. 딸을 염려한 아버지는 어느 날 잠시 금강산 구경이나 다녀오라고 권유하고, 이에 이춘봉은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 보타각에서 출가수행 중이던 6촌 언니스님을 찾아간다. 이때가 1922년 그녀의 나이 33세로, 1914년에 개통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안변을 거쳐 외금강역에 내려 온정리로 해서 신계사 보타각으로 찾아갔다.

어느 날 이춘봉은 내금강 망군대 아래 도솔암을 구경하러 갔는데, 관광안내원이 바위틈에서 솟는 샘물을 보고 생리 중인 여성이 이곳에 와서 빨래를 하면 부정을 타서 물이 안 나온다고 설명하는 것을 듣고 반발심에 마침 비어있던 도솔암에서 스스로 시험해 보겠다며 홀로 남았다. 그런데 가만히 도솔암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돌연 마음이 바뀌어 기왕에 이곳에 왔으니 저 불교인들이 하는 100일 기도라는 것이 뭔지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내게 된다. 100일 기도를 마친 후 이춘봉은 전혀 딴 사람이 되었으며,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던 석두선사의 법문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동안 서양학문과 서양종교만 옳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편협함을 반성하게 되었다.

맹렬여성이 수행에 돌입하자 크게 바뀌어 금강산의 대선사로 추앙 받던 석두스님도 그만 이춘봉의 정진력에 감동하게 되었다. 스님은 본래 본인이 수행하려고 마련해두었던 신계사 뒷산 세존봉 바위벼랑 위에 제비집처럼 지어둔 토굴 도솔암을 이 신참내기 이춘봉에게 양보한다. 이춘봉은 석가모니의 6년 설산고행을 본받아 6년간 도솔암에 머물며 남의 논밭에 나가서 이삭을 주워다가 하루 한 끼씩만 먹고 수행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석두스님과 잠깐의 인연으로 아들을 잉태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훗날의 석정스님이다. 이 해는 1929년 이춘봉 나이 39세, 석두선사의 나이 47세 되던 해였다.

이춘봉은 아들 출생 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추수가 끝난 벌판의 이삭을 주워 먹고 생활하며 불법에 한치 어긋남이 없이 수행하며 아들을 길렀다. 이춘봉은 어린 아들에게 3세 이전에 천자문을 다 가르치고. 주변에 인가도 없이 모자만 살았으며, 오롯한 수행자로 살았다. 그녀는 또한 일찌감치 아이의 재능이 미술에 있음을 알아채고 불교미술 쪽으로 인도하였고 훗날 출가한 아들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불모가 되었다. 나중에 유명인사가 된 아들 석정스님이 금강산으로 돌아와 어머니 이춘봉을 모시고 남하하고자 했으나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거절하였다. 당시는 38선이 생기면서 금강산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다. 북한정부가 식량배급제를 시행했는데, 어머니는 공산당원이 아니라서 배급표를 얻지 못해 굻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남한으로 함께 탈출하기를 간곡히 청하는 아들의 청을 어머니는 한사코 거절하며 “나는 금강산에 정착하면서 산 밖으로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이춘봉은 아들 석정스님이나 아들의 부친인 석두스님에게 의지하지 않았으며 금강산의 수행자로서 금강산에 남아 최후를 마쳤다. 이춘봉 보살의 입적 후 법기암의 보살과 비구니스님들이 그녀를 다비해 주고 남하했다고 한다. 이춘봉에 대한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아들 석정스님 덕분이다. 과문인지는 몰라도 비구 스님이 자신의 어머니를 이처럼 기리며 주위에 적극적으로 알린 경우는 보지 못한 것 같다. 석정스님에게 있어 이춘봉은 어머니이기에 앞서 위대한 수행자였던 것이다. 이춘봉 보살님에 대한 정보는 샤카디타 코리아 공동대표 조은수 교수님의 도움으로 『석정서화집』 안에 적힌 최완수의 「석정화상평전」을 주로 참고하였고 기타 불교계 신문 자료에서도 약간을 참고하였다.

백성욱 박사의 스승 혜정 손석재 보살님

혜정 손석재 (출처: 백성욱박사 현토 및 번역. 『금강반야바라밀경』 p. 422)

혜정 손석재는 금강산 장안사 근처에서 1882년에 태어났다. 본래 가족들이 서울에 살았는데 이 해 6월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온 가족이 금강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태어난 것이다. 손석재 보살님은 태어날 때 오체투지의 모습을 하고 나왔다고 한다. 3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살 때 가족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으나 늘 금강산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마침내 금강산으로 돌아가 공부에 전념하였고 큰 진전이 있었다.

백성욱 박사는 1910년 봉국사에서 최하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비구스님이다. 1919년 경성불교중앙학림(京城佛敎中央學林)을 졸업하였고,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 유럽으로 건너가서 1925년 독일에서 한국인 최초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하여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후 좀 더 수행하기 위해 금강산 토굴에 들어가 수행을 했는데, 이를 눈여겨 본 혜정 손석재 보살님이 백성욱 박사를 지도해주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심한 시대였으나 그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손석재 보살님의 도가 높았던 것 같다. 손석재 보살님은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출가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1930년 금강산 표훈사 신림암의 이성혜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한때 출가사문으로서 활동을 하신 적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성욱 박사는 손석재 보살님을 스승으로서 평생토록 지극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물론 한국전쟁기 부산 피난처에서도 새벽마다 목욕재계하고 스승을 찾아뵙고 문안을 드렸으며 법문을 들었다고 한다. 백성욱 박사는 해방이 되자 애국단체 중앙공작대를 조직하고 민중 계몽운동을 했으며, 상해임시정부 시절 인연이 있던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참여했고, 1950년 제4대 내무부장관, 1951년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고, 1953년 7월, 부산 피난 중 동국대학교 제2대 총장에 취임, 이후 5·16 군사정변으로 동국대학교에서 물러나게 된 1961년 7월까지 중구 필동에 대학교 교사를 건립하고 시설·학사·교수 등 다방면에 걸쳐 동국대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그 배후에서 손석재 보살님이 큰 역할을 했다. 손 보살님은 입적 후 사리 152과가 나왔다고 한다. 한편 백성욱 박사는 1962년 65세에 경기도 부천에 산을 개간, ‘백성목장’을 경영하면서 『금강경』을 강의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지금까지 많은 후학들이 그의 뜻을 잇고 있다.

여기서 잠시 혜정 손석재 보살님이 백성욱 박사에게 준 법어를 살펴보자. 비록 이 방면에 일천한 필자이지만 몇 줄만 읽어도 위대한 도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법(法)이다. 보아라!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 티끌만한
미세한 분별도 있지 아니한 그 자리

무량대복(無量大福)이 꽉 찬 그 자리
이 세상 모든 중생에게 다 나누어 주어도
조금도 줄어들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는 그 자리

밝기가 낮과 같이 밝되 무내외(無內外)라
안팎없이 밝은 이 보배를
너에게 주노니 네가 지킬 테냐?

 

분단 이후의 금강산, 선녀는 날개옷을 던지고 인민노동자의 길을 선택했다

1950년대부터 북한정부는 금강산을 문학과 예술을 통한 인민 사상개조의 소재로 활용해 왔다. 구체적 말하자면 남한에서도 익숙한 금강산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사회주의 사상에 부합되게 변형시켜서 지속적으로 학습시켰다. 이러한 방식은 이웃 사회주의 국가의 사례와 대동소이하다. “선녀와 나무꾼”은 “금강산 팔선녀”라는 이름으로 50년대 이후 지금까지 그림책, 소설책, 영화, 벽화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북한 인민들에게 보급되어 왔다. 비록 작품마다 주인공 남녀의 이름이나 등장인물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다.

북한 애니메이션 ‘금강산 팔선녀’ 유튜브 캡처

날개옷을 숨긴 장본인은 나무꾼이 아니라 사슴이다. 목숨을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사슴이 자발적으로 선녀의 옷을 훔쳐 숲에 감춘다. 선녀는 땀 흘려 신성한 노동을 하며 남을 속이지 않고 배려심이 많은 청년 나무꾼에게 반한다. 천상에서 그녀를 구출해서 하늘로 데려가지만 하늘에서 살기를 거부하며 날개옷을 버리고 지상으로 내려와 나무꾼과 함께 신성한 노동의 길을 택한다. 특히 2008년 평양시네마에서 제작한 「금강산 팔선녀」는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금강산을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의 고향으로 인식시키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다. 이런 이야기를 소설, 영화, 만화로 거듭 읽고 보아온 북한 주민의 눈에는 금강산을 불교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남한 사람들이 무척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남한의 불자들이 금강산을 다시 불교문화가 꽃피는 땅으로 만드는 일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참고자료>

김기룡. 『미륵부처님 친견기』. 불교통신교육원(1983)
백성욱박사 현토 및 번역. 『금강반야바라밀경』 도서출판 공경원(2006)
석정스님. 『석정시문·서화집』. 사단법인 성보문화재연구원(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성욱’(네이버 지식백과)
금강산팔선녀 영어판 https://www.youtube.com/watch?v=DGcBJG8papI
금강산팔선녀 한국어판 https://www.youtube.com/watch?v=6qEtfsWVx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