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혜경(한국코치협회 인증 전문코치, 코칭북제작소 대표)
예순, 이 남자의 홀로서기
코칭의 단골 이슈는 관계의 갈등이다.
가족이라서 생기는 미움과 원망, 가까운 사이에서 느끼는 섭섭함과 억울함, 어떤 문제든 원인을 파고들면 사랑과 미움이 한 뿌리에서 나온다.
부부 사이의 애증은 더욱 미묘하고 복잡하다. 핏줄이 아니면서 공동 운명체로 묶인 두 사람은 가까워서 더욱 멀어지는, 속 모르는 사이가 된다.
은퇴 후 부인에 대한 섭섭함으로 괴롭다는 남성 고객이 있었다.
문영 씨는 은퇴하면 아내 미자 씨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리라는 기대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몇 달 간 아내는 그동안 수고했다며 삼시세끼를 정성껏 차리고 함께 다정한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지만 점차 남편이 집에 머무는 시간을 불편해하더니 자신의 외출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출퇴근 때는 몰랐는데 집에 있어보니 아내는 자신이 모르는 친구도 많고 사진이며 합창이며 동호회 모임도 많았다.
문영 씨는 그런 아내가 야속하다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무슨 비밀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어 아내의 수첩이나 컴퓨터를 뒤지기도 했다. 아내는 잘도 살아왔는데 자신만 가족을 위해 오래 고생한것처럼 지난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미운 마음도 힘들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었다는 자괴감까지 들어 이중의 고통입니다. 전 평생 아내 밖에 몰랐습니다.”
부부 사이의 객관화를 위해서 코치는 서로의 대화를 기록하고 가능하면 녹음을 해서 다시 들어볼 것을 제안했다.
문영/ 내일 외출한 건데 셔츠 다림질이 안 되어 있네?
미자/ 그래요? 미리 말하지.
문영/ 빨래하고는 왜 다림질을 안 했어?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미자/ 뭐하는 사람? 아직도 그 소리야. 언제까지 당신 치다꺼리를 해줘야 해? 이제 다림질 정도는 당신이 좀 하면 안 되나.
문영/ 다음 주말에 영화 보러 가자. 예매해 둘게.
미자/ 영화? 집에서도 볼 수 있는데 답답하게 뭘 영화관까지 가요? 그리고 다음 주말에는 약속 있어요.
문영/ 어딜 그렇게 매일 나다녀?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미자/ 내가 하는 일은 다 하찮은 건가. 당신이야 말로 언제까지 나만 붙잡고 늘어질 거예요?
문영/ 동네 산책 다닐 때 입게 카디건 하나 사줘.
미자/ 어떤 걸로? 그냥 당신이 마음에 드는 것 사면 안돼요? 사오면 색깔이 어떻고 디자인이 어떻고 당신 까다롭잖아?
나는 이 대화를 다른 사람(가능하면 여성)에게 들려준 다음 그 느낌을 들어보고 다시 코칭을 해보자고 했다. 그는 딸과 여동생에게서 이런 소감을 들었다.
“여전히 부인을 시중드는 아내로만 생각하고 있다. 부인의 바깥 활동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관심이 없다. 묻지도 않고 영화 보러 가자고 먼저 결정해 통보하지 않았나. 이제껏 아내에게 일상을 의존해왔는데 은퇴 후에는 어떤 인생을 살 건지 자신만의 계획을 세워보지는 않았는지?”
문영 씨는 자신을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남편으로 치부하는 그들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아내와 남편의 할 일이 나뉘어 있었는데 이제 와서 뭘 어쩌라는 거지? 그에게 부부란 남편과 아내일 뿐이었다.
사랑은 홀로 선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것
부부가 어떤 사이여야 하는지 새롭게 알아야 한다니 문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이때부터 문영 씨의 코칭 이슈는 <노년의 부부가 사는 법>이 되었다.
부부란 일방으로 챙겨주고 돌봐주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를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고 함께 길을 가는 도반이라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 6주간의 코칭 시간이 필요했다. 집안의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실은 아내의 챙김을 받는 의존자라는 자각이 들 때 문영 씨는 섬찟했다.
마지막 세션에서 문영 씨는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스페인 순례 길을 혼자서 가볼까 해요”
홀로서기를 격려하는 나에게 그는 쓸쓸하게 말했다.
“아직은 힘듭니다. 나이 들수록 아내가 더 필요해요. 하지만 혼자의 시간을 즐기지 못하면 정말로 외로워질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붓다가 깨달음 후 외친, 하늘 아래 홀로 존귀하다는 이 한마디는 자신만이 최고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치 만큼 타인도 귀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니, 여기에 붓다 말씀의 진리와 묘미가 있다.
연기(緣起)의 눈으로 보면 나는 누군가의 수고로움으로 존재한다. 밥알 하나도 많은 이들의 수고가 담겨져 내 몸으로 들어간다.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부부란 그야말로 엄청난 인연이며 연기이다. 이런 부부 사이를 동일 운명체라는 착각으로 한쪽에서 흡수하는 관계를 강요하면 건강하지 못한 악업(惡業)의 관계가 되어버린다.
문영 씨가 순례길에서 보내온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처음으로 홀로 된 40여 일의 이 시간이 결혼생활 전체보다 더 긴 것 같습니다. 고독하지만 오로지 나 자신만을 볼 수 있어서 새롭습니다. 나도 꽤 괜찮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행복하네요.”
문영 씨 부부가 천상천하유타독존(天上天下唯他獨尊)하기를!
◯ 현대불교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Buddhist Coaching 칼럼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읽고 싶으면 여기로 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