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홍서원과 함께하는 불자의 삶

삼선불학승가대학원 학감 수경

불자의 삶은 서원에서 시작됩니다. 서원은 삶의 원동력이 될 뿐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마침내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원이란 보리심과 관련되어있습니다. 물론 초기불교 때부터 원이 보리심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개개인의 행운을 바라거나, 내생에는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등 다분히 세속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이후 ‘붓다를 찬탄하고 공양을 올리는 자’들이 점차 ‘붓다를 자신들의 이상으로 실현하고자하는 자’로 바뀌어가면서 원도 달라져갔습니다. 이에 따라 전생의 석가모니 붓다를 보살로 불렀던 것처럼 자신들도 보살이라고 자처하게 되었으며, 보살의 원도 자연스럽게 보리(깨달음)를 바라는 쪽으로, 나아가 모든 중생의 안락을 바라는 서원, 불국토를 이루고자하는 서원 등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내용으로 발전해갔습니다.

불교는 원의 종교라고 할 만큼 끝없는 불보살들의 서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천수경』의 관세음보살의 본원인 십원육향(十願六向), 여래십대발원문, 사홍서원, 『무량수경』의 법장비구의 48원, 『승만경』의 십대수와 삼대원, 『약사경』의 약사여래불의 십이원 『아촉불경』의 아촉불의 열한가지 원, 『십지경』의 십대원, 『화엄경』의 문수보살의 서원, 보현보살의 십종행원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사홍서원은 모든 보살의 공통적인 서원이라 해서 총원이라고 합니다. 그 외는 각각의 보살 혹은 수행자의 개별적인 서원이라는 의미로 별원이라고 합니다. 사홍서원은 모든 불교의례의 마지막을 장엄합니다. 의례를 서원으로서 마무리한다는 것은 사홍서원이 그만큼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하는 불교의 강령이자 발원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사홍서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생무변서원도 : 중생이 끝이 없어도 제도하겠습니다.
번뇌무진서원단 : 번뇌가 끝이 없어도 끊겠습니다.
법문무량서원학 : 법문이 끝이 없어도 배우겠습니다.
불도무상서원성 : 불도가 위없이 높아도 이루겠습니다.

『法界次第初門』에 의하면 “사홍서원은 보살의 발심이고, 보살만행의 근본이며 보살이 마침내 신령스럽게 깨닫는 근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사홍서원은 붓다의 초전법륜인 사성제를 실현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무변서원도’는 ‘고성제’에 대비하여 일으킨 서원이며, ‘번뇌무진서원단’이란 ‘집성제’에 대비하여 일으킨 서원이고, ‘법문무량서원학’은 ‘도성제’에 대비하여 일으킨 서원이며, ‘불도무상서원성’은 ‘멸성제’에 대비하여 일으킨 서원이라는 것입니다.
사홍서원을 세우고 붓다의 초전법륜인 사성제를 깨닫는 길, 바로 우리 불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천수경』에는 위의 4구외에 아래의 4구가 더 있습니다.

자성중생서원도 : 내 맘 속 중생심을 제도하겠습니다.
자성번뇌서원단 : 내 맘 속 번뇌심을 끊겠습니다.
자성법문서원학 : 내 맘 속 법문(지혜)을 배우겠습니다.
자성불도서원성 : 내 맘 속 불도를 이루겠습니다.

이것은 구제해야 할 대상이 내 마음 밖에 실재하는 대상으로서 중생이 있다든가, 끊어야 할 번뇌가 있다든가, 배워야 할 법문이 있다든가, 이루어야 할 불도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중생은 자성중생이고, 번뇌는 자성번뇌이고, 법문은 자성법문이고, 불도는 자성불도라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주는 것이지요.

『육조단경』에 의하면 혜능선사는 “중생과 번뇌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찾아 제도해야 한다.” 또 “법문과 불도는 자신의 불성을 봄으로서 완성되는 일이므로 항상 불성을 보기위해 수행할 것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원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불자는 멀리로는 불성을 깨닫고자 하는 원대한 서원을 세우고 가까이로는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중생심과 중생심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탐진치 삼독번뇌와 갈애를 끊으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유의할 점은 자성청정한 마음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중생심과 번뇌의 실체는 허망한 것임을 알고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또 허망하다고 해서 없다고 부정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중생심의 굴레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의 본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부처의 성품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이러한 생각들은 깨달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체가 없는 허망한 생각들이다. 생각하는 주체인 나도, 대상도 모두 공한 것이며, 나의 것은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허망하게 일어난 중생심에 휘둘리지 않도록 늘 마음의 중심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내 맘속 중생심과 번뇌심을 덜어내는 실천인 것입니다. 이러한 서원과 실천을 통해 불자의 삶을 보살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 바로 성숙된 참 불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