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비구니스님들의 흔적을 찾아서 – 글: 전영숙

분단시대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지만, 과거 여성 수행자들 중 남성수행자들처럼 남북 불교성지 곳곳을 종횡하며 수행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의 발길은 금강산, 묘향산은 물론 멀리 함경도 일대까지 미쳤다. 고려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엄혹한 조선 시대조차 부처님을 따르는 많은 여성들이 오늘날 북한 땅 불교 성지 곳곳을 누볐다. 드물지만 그 행적의 일부가 오늘까지 전해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금강산 신계사 비구니 사신(1694~1765) 스님의 이야기가 유점사본말사지에 남아 있으며, 묘향산 보현사 비구니 정유(1717~1782) 스님의 이야기가,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수원 화성 축성에 관여한 채제공(1720~1799)의 문집에 남아 있다. 글 속에서 채제공은 정유스님을 일컬어 ‘여대사(如大師)’라고 칭송하였다.

이들 지역 중 특히 금강산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 수행자에게도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사찰 중창기나 고승의 비문 등을 통해 금강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비구니스님들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현종 때 표훈사의 법장스님, 영조 때 장안사의 덕훈스님, 순조 때 장안사 관음암의 선근스님, 헌종 때 표훈사 청련암의 정근스님, 철종 때 신계사 문수암의 상엽스님, 고종 때 표훈사 신림암의 법정스님 등이 그 예이다.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불교계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당시 남성의 손으로 기록된 자료에 여성의 이름이 남았다는 것은 이분들이 바친 헌신과 기여가 얼마나 컸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금강산사대사찰전도_1899년

출처: https://blog.naver.com/rbh54/221348176303
※ 이 그림을 자세히 보고 싶은 분은 국립중앙도서관(검색어: 금강산사대사찰전도) 디지털자료 이용을 추천한다.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크기만큼 확대해서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위의 지도는 19세기 후반 금강산 일대 큰 절과 부속 암자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도에서 한 가운데 있는 대찰이 유점사이고, 동쪽에 있는 것이 신계사이며 서남쪽 모퉁이에 그려져 있는 것이 장안사이고 서북쪽 모퉁이에 보이는 것이 표훈사이다. 흔히 이 네 사찰을 금강산의 대표 4대 사찰이라 부른다. 이 중 표훈사는 4대 사찰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이자 북한의 ‘국보유적 제97호’다. 신계사는 한국전쟁 때 전소되고 삼층석탑만 남아 있던 것을 2004년 11월 남측의 조계종과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이 현대아산(주)과 공동으로 대웅전을 복원하고, 2007년 10월 명부전을 비롯한 11개 전각을 모두 중창했다. 장안사와 유점사는 훗날을 기약하고 있다. 지도를 자세히 보면 큰 사찰에 딸린 암자들도 제법 그려져 있는데, 그 중에는 위에서 거론한 비구니 암자의 이름도 종종 눈에 띈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그 옛날 금강산 비구니스님들과 이들 비구니스님을 의지하여 함께 수행했던 여성 수행자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금강산의 비구니들

한편 금강산 비구니스님들의 모습은 1927년 독일인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신부가 촬영한 필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세기 초 금강산 암자의 비구니스님들

출처: 유튜브 ‘독일의 노르베르트 베버신부, 100년전 조선을 촬영하다 KBS’ 캡처

위의 자료는 장안사 부근의 비구니암자 중 하나로 짐작된다. 가파른 산길을 걸어 올라오느라 잔뜩 목이 마른 젊은 비구스님이 사발을 들고 물을 마시는 옆에 세 분의 비구니스님이 촬영을 위해 나란히 서 있다. 세 분이 연령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아 비구니스님 삼대가 함께 이 암자에서 생활하는 것 같다. 가운데 계시는 스님을 중심으로 보자면 우측이 은사스님이고 좌측이 상좌스님이 아닐는지? 쌓아둔 땔감과 소박한 방문, 비스듬히 세워진 지팡이 등에서 과거 고단한 시기를 살면서도 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던 비구니스님들의 끈기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한국비구니문중과 금강산

한국비구니 연구의 개척자 하춘생의 『한국의 비구니문중』(해조음, 2013)을 살펴보면 한국의 비구니문중 가운데 금강산에 뿌리를 둔 문중은 제법 많은 것 같다. 개략적으로만 살펴보아도 보운문중, 봉래문중, 법기문중, 실상문중, 청해문중(가나다순) 등을 찾을 수 있다.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먼저, 보운문중을 살펴보자. ‘보운’이라는 이름은 초조 보운당 윤함스님의 법명이자 암자의 이름에서 연원한다. 윤함스님은 물론 2세 금강당 선유 스님, 3세 심월당 정엽(1839~1913)스님 등이 모두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주석한 분들이다.

봉래문중 또한 금강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봉래문중은 제3세 사득(四得, 1862~1940)스님과 제6세 본공(本空, 1907~1965) 스님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수행했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금강산의 여름명칭을 문중 이름으로 삼았다. 사득스님은 1887년 26세 때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하여 1940년 세납 79세에 입적하였다. 스님은 속가에서 받은 유산을 유점사⋅장안사⋅표훈사⋅신계사⋅마하연 등 금강산 여러 사찰에 아낌없이 보시하였으며 득도암을 창건하여 비구니 수행도량을 마련했다고 한다.

법기문중도 금강산과의 인연이 지중하다. 법기문중은 신계사 법기암의 대원스님을 초조로 삼고 있다. 대원스님의 생몰연대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스님의 법을 이은 2대 충휴 스님, 3대 처금스님과 창섬스님 등 후계법손들이 분단 전까지 금강산 법기암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법기문중이자 비구니계 큰 스님으로 응민스님(1923~1984)과 인홍스님(1908~1997)도 법기암과 인연이 깊다. 응민스님은 1937년 신계사 법기암에서 출가하셨고, 인홍스님은 법기암에서 오래 정진하셨다고 한다.

실상문중도 금강산과 인연이 깊다. 초조 실상스님과 2세 순동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에서 오래 주석하다가 덕숭산 수덕사 견성암으로 내려왔다. 올곧게 평생을 수행에 임한 실상스님을 기리어 문중 이름도 실상문중이라 정했다고 한다. 실상문중은 제3세 의선(義善, ?~1923)대에 와서 13명의 제자를 배출하며 크게 성장하였다. 의선스님은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선사 중의 한 분인 만공스님(1871 ~ 1946)의 속가 어머니이기도 하다.

청해문중은 고려후기금강산에서중국의 취진쌍운(翠眞雙運)을은사로,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을 계사로 출가한 비구니 도한(道閑)스님과 대유(大宥)스님에 연원을 세웠다. 특히 청해문중은 도한스님의 제6세손인 기수(琪守)스님이 유점사에 화엄경 1질을 봉안한 인연에 의거하여 금강산 유점사를 문중 발원 사찰로 삼고 있다.

이처럼 대략적으로만 살펴보아도 금강산은 한국 비구니스님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필시 우바이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겠지만 이와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다. 한반도 평화와 한국 여성불교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금강산의 비구니암자들은 기억되어야 하고 차차 복원되기를 희망한다.     

 

[참고자료]

하춘생(2013), 『한국의 비구니문중』, 해조음
대한불교진흥원(2009). 『북한의 사찰- 북한의 불교와 사찰, 그 과거와 현재』
리인철(2003). 『조선의 절 안내』, 조선문화보존사 (평양)
국립문화재연구소(1998). 『北韓 文化財 解說集. 2 : 寺刹建築篇』
사찰문화연구원 편(1993).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국립중앙도서관
https://www.youtube.com/watch?v=CPEAifC4zsQ
https://blog.naver.com/rbh54/221348176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