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숍] 통런 명상 – 텐진 빠모 스님

통런 명상

14th Sakyadhita, Workshop on Meditation, 27 Jun 2015

강연 | 텐진 빠모 스님 Ven. Jetsunma Tenzin Palmo
번역 | 안지숙

*이 글은 텐진 빠모 스님이 2015년 6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열린 제14차 샤카디타 세계여성불자대회의 <명상 워크숍> 프로그램에서 가르치신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오늘 오후에는 인도네시아와 관련이 있는 수행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바로 아티샤가 수마트라에서 가르쳤던 수행입니다. 아티샤가 티벳으로 가기 전 인도네시아에 왔을 때, 로종(Lo Jong)을 배우면서 몇 년간을 보냈습니다. 로종은 마음 수련이지만 사실 마음이 아니라 태도를 수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것 중, 특히 어려움과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는 가, 또 어떻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어려움을 장애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수행과 발원의 기회로 받아드릴 수 있는 지를 수련하는 것입니다. 이후 티벳에서는 로종 수행법에 관한 책들이 아주 많이 만들어지는데, 그 중에 이 통런 수행법이 나옵니다.

통런은 말 그대로 '내보내기'와 '받아들이기'를 의미하며, 실천적 자비를 닦는 수행으로,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아상)를 극복하는 방법을 아울러 배우게 됩니다. 이 수행의 기본 원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이 수행은 초보자뿐만 아니라 수행 정도가 높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행되었고, 티벳 전통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종파에서 통용되는 수행이며 어떤 특정한 사람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개인이 아닌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위한 보리심과 발원(염원)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안으로 받아들이기’ 다음 ‘밖으로 내보내기’를 합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의 아픔을 겪고 있는 어떤 사람을 상상합니다. 고통받는 사람(대상자)과, 그를 돌보는 사람을 상상합니다. 왜냐하면 이 수행은 단순한 정신적 연습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즉 감성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모가 아프거나 혹은 가까운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이 수행의 이상적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대상자)을 가시화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진짜 심각하게 아프거나, 예를 들어 입원하게 되어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고 앉아있을 때, 통런 수행은 매우 좋은 수행이 됩니다.

당신은 그 곳에 조용히 앉아있습니다. 아무도 당신이 수행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단지 가끔씩 누군가가 들어올 때 방안의 분위기가 다소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환자들이 위안을 받는 무엇인가를 다소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사진을 찍어 가지고 그것을 보고 대상화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여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자비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들숨이 눈에 보이듯 상상합니다. 들숨을 통해서 그의 모든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 조차도, 그리고 그 고통을 만들어낸 조건이 된 행위까지도 빨아들입니다. 그 들숨과 함께 빨아들인 고통을 검은 빛 혹은 연기의 형태로 만들어 가슴 중심까지 내려오도록 진공 청소기처럼 들이마십니다. 쓰~읍~,이렇게요. 모든 어둠이 빠져나와서 코를 통해 여기 심장 중심 안으로 빨려 들어옵니다. 이때 심장은 신체기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비와 사랑을 느끼는 감정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 가슴의 중심에서 우리는 검정색 진주 혹은 검정색 구슬을 가시화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아상)이며, 곧 자기에 대한 관심과 생각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통런 수행에 대해 ‘통론 수행은 매우 좋은 수행이고 나도 좋아하지만, 그렇게 실제로 되지는 않겠지요. 그렇지 않나요?’라고 묻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암세포를 받아들이겠다고 상상한다해도, 실제로 암을 받아들이지게 되지는 않겠죠, 그렇죠?’ 이것이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를 원하지만 솔직히 내가 오롯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효과가 없는 것이죠.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타인의 고통을 내 속으로 받아들인다면,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즉 고통을 겪는 타인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갖긴 하지만,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자기중심적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줄이면, 작은 다이아몬드나 흰 진주 같은 것으로 바뀌어집니다. 이것은 순수한 본성 혹은 불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성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죠? 바로 우리의 자아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큰 자아를 막는 것은 작은 자아라고 합니다. 불교는 자아라는 말을 쓰려고 하지 않지만, 큰 자아는 이 작은 자아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 받습니다. ‘나, 나, 나, 나, 나’ 에 대한 생각으로 둘러쌓인 작은 마음보다 그 이상의 범주와 무한히 더 큰 의식과 자각의 단계가 있습니다. 심지어 착한 내가 되도록 혹은 친절한 내가 되도록 노력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나에게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해결될 때, 어떤 사람의 마음이 결코 오염되지 않는 의식의 상태일 때, 무한한 넓은 경지로 마음이 열립니다.

그 마음은 광활한 하늘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타인의 고통을 가시화해도 결코 오염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 마음인 검은 진주는 사라지고 즉시 완전히 다른 진정한 본성/불성으로 대치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와 자비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체현된 사랑입니다. 날숨과 함께 황금색 혹은 흰색의 결코 오염되거나 더럽혀질 수 없는 무한한 안녕의 빛이 됩니다. 날숨과 함께 그것이 나가는 것을 상상하면 자비의 대상에게 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메타(metta)입니다. 그 빛을 가시화해서 대상의 몸 매 세포마다 스며들어 부정적인 카르마를 철저히 없애고 완벽하게 정화하여 완전하게 다시 좋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명상입니다.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이용될 수도 있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수행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수행할 때 그 명상수행을 너무 너무 좋아하기 전까지는 다소 인위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수행을 하려고 계속 노력하면, 어느 날 정말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합니다. 그 사람의 고통의 아픔에 실제로 마음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쁨의 수준과 같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를 줄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주목하지만 솔직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타인의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어떤 수준이 될때 자아가 없어질 때입니다. 마음이 깊은 자비로 충만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방법은 우리 스스로가 아플 때도 이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지속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편두통과 같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냥 그 자리에 누워서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대신 우리는 이 수행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들숨과 함께 지금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편두통을 내가 받아들이겠다고 상상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두통을 내게로 와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날숨에 있어서, 빛으로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고통과 아픔의 원인, 그것을 일으킨 행위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카르마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아픔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슬픔이 어떤 것이든 간에 지금 이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혹은 더한 고통에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을 여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드릴 수 있는 이 기쁨의 감정, 만약 타인이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참아 내는 것입니다. 고통과 자비의 조합 그 자체를 함께 받아들이고 기쁨과 자비로 그것을 대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 스스로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때,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한 존재로 바뀝니다.

우리가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가끔 매우 인위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혹은 어떤 사람은 이게 너무 잘 되면 어떤 사람은 패닉합니다. ‘수행을 너무 잘되서 진짜 효과가 나타나면 그 다음 어쩌지?’ 이 때가 좋은 상태입니다.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정말 효과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 좋아집니다. 자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작동하는 것과 어떻게 긴장을 풀어서 천천히 점진적으로 극복하는 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의를 가지고 진심으로 임한다면 이 수행은 매우 위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수행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는데, 멀리 있거나 가까운 곳의 전혀 모르는 사람의 통런수행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안과 자유의 느낌을 얻었는지에 대해 알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그냥 상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은 매우 강력하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즘 세상에서 사람들이 오염에 관해서 특히 많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적 오염, 즉 수질오염, 토양 오염, 공기 오염 등에 매우 걱정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에 의해 야기되는 정서적인, 감정적인 오염이야 말로 매우, 매우 우리 행성을 오염시키는 것이죠. 즉 폭력, 화, 욕망, 질투, 증오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양산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즐기는 오락거리조차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중 비행기를 타고 이 곳으로 오는 동안 탑승객들이 무엇을 보고있던가요? 온통 폭발하는 장면이 가득한 그런 오락거리를 보고 있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스러운 곳을 가려고 할 때 보드가야, 메카, 프란치스코 교황이 온 이태리 시칠리 이러한 곳을 생각합니다. 그곳에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는데, 비록 영적인 것에 관심 없는 사람조차도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곳은 축복으로 활기가 넘치는 아주 특별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아우슈비츠나 벨슨 같은 곳을 가게 된다면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전혀 몰라도, 끔찍한 트라우마와 고통과 아픔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그 곳에서 있었던 일 뿐만 아니고 그 후 수년 동안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그 아픔과 고통을 느끼고 그들의 아픔에 물들였고, 그래서 그것을 호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감정은 단순히 우리 두뇌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과 지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통런 수행을 할 때, 그 생각은 우리 몸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모든 환경을 바꿉니다, 즉 수행을 하고 있는 곳이나, 또한 우리 수행의 대상자가 있는 곳의 분위기를 바꾸고 그들은 그것을 느낍니다.

여기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 날에는 무엇을 할건가요? 하고 계속해서 묻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 내면에서 뭔가 좋은, 힐링 되는 듯한 어떤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의 고통이나 아픔이 없어지지 않더라도 어쨌든 분명한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뿐만 아니라, 수행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진심으로 이 수행을 한다면 우리 내부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 마음이 얼마나 닫혀 있었던 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너무 많이 받아들여 내 자신이 너무 고통스러워 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 수행은 또한 우리에게 감각적인 힘을 줍니다. 비록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정신적, 감정적으로 우리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동물보호나 인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절망으로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에게나 동물에게 하는 짓이 너무 끔찍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죠. 이 분야의 사람들은 일로 인해 감정이 완전히 점령되고 소진되어 버립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들숨으로 빛을 받아들이고 날숨으로 어둠을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고통에 직면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변형시켜 빛을 내보내는 것이 더 힐링이 됩니다. 그래서 동물보호 단체와 같은 곳의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없애는 능력이 없는 다른 존재의 고통을 보면서 그들이 느끼는 고통을 없앨 수 있게 하는데 굉장한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예로 달라이 라마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는 티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게 그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그들은 그를 자비의 구현으로 생각하고 모든 고민을 쏟아 붓습니다. 자신의 권리가 박탈당했거나 끔찍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에게 와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깊이 감명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5분 후, 그는 호탕하게 웃습니다. 허허허, 모두가 그의 웃음소리를 알지요. 그것은 더 이상 그 고통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고통을 받아들여서 그의 지혜로 변형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그 고통을 더 이상 마음속에 무거운 짐덩어리로 여기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여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그 고통이 오히려 우리 마음 속에서 무겁게 눌러 앉아 버려 그것을 소화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타인에게도, 누구에게도 도움이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완전히 지쳐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우리 스스로를 열고, 지혜의 에너지와 자비로 그것을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매우 현실적으로 이것을 수행하는 것이 통런 수행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이용하여 마음 속 자아를 없애기 위해서, 마음 속의 진실된 자비의 지혜보다도 더 큰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수행이며 이러한 이유로 수세기 동안 티벳에서 소중히 여겨져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에 의해 수행할 수 있는 모든 단계의 수행이었으며 자신의 가능성을 열게하는 수행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혜와 자비 본성에 진실로 마음을 여는 것에 대해 무엇이 진정한 것인가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같이 해 보겠습니다. 먼저 당신의 마음을 당신이 아는 누군가, 아마 당신이 돌봐야 하는 사람에게,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 대상자는 생각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면 안됩니다. 전체 그룹의 누군가를 상상해서 마음을 열기에는 다소 두려움을 느끼게 되므로, 지금은 특정한 한 사람이 우리 앞에 앉아 있다고 상상합시다. 그가 내 앞에 앉아있다고 가시화한 다음, 들숨과 함께 이 생애뿐만 아니라 과거 삶 속에서의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고통의 원인을 빨아냅니다. 그리고 검정 빛의 형태로, 검정 연기가 좋으면 연기로 ‘당신이 고통을 받아서 미안하지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의 검정 진주가 있는 가슴 중심까지 숨을 들이 마십니다. 그 다음 스스로에게 ‘아니야, 내가 당신의 고통을 받아 들임으로써 행복해 지기를 원해’라고 말합니다. 비록 여전히 마음과 마음 사이에 그 것을 믿을 수 없겠지만, 당신은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잠재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검정 빛을 빨아 들려서 작은 검정 진주에 흡수시킵니다. 그 즉시 검정 진주는 매우 밝고 투명하고 흰 진주나 다이아몬드, 혹은 당신이 생각하고 싶은 어떤 것이 되며, 이는 곧 불성을 의미합니다. 물론 불성은 실제로 당신 작은 마음 안에 있는 진주나 다이아몬드는 아닙니다.

하지만 가시화를 위해서, 다이아몬드처럼 순수하면서도 결코 깨지지 않는 어떤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는 결코 어둠으로 오염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둠에 자리를 양보하더라도, 빛을 켜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아를 없애는 것,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없어지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순수한 가능성을 열게되며, 이것이 바로 불성의 가능성입니다.

다음은 날숨으로 흰색 빛, 황금색 빛 혹은 치유의 푸른 빛, 어떤 색이라도 상관없이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색으로, 그러나 매우 밝고 찬란한 색의 빛의 흐름이 가득한 날숨을 밖으로 내보내어 그를 완전히 둘러쌉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건강, 안녕, 사랑, 지혜 등 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빨아 내어 그에게 불어넣습니다. 그러면 그의 모든 세포는 치료되어 평화와 행복과 건강함을 느낍니다.

다시 들숨으로 가서 호흡을 진행합니다. 아티샤가 말했듯이, 들숨으로 당신은 어둠을 받아들이고 날숨으로 빛을 내보는 것입니다.

약 15분 동안은 이 명상을 할께요. 15분은 좀 길 것 같군요. 10분으로 할께요. 긴장을 푸시고 마음을 열고 넓게 가지세요.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는 걱정하지 마세요. 소리는 그냥 떨림 일뿐입니다. 현재 순간의 호흡에 집중하세요. 우리의 자비의 대상을 상상해보세요. 들숨과 함께 어둠을 받아들이고 날숨과 함께 빛을 내보내세요. 당신이 아주 조금씩 느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프라나야마(pranayama: 호흡법) 연습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호흡을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질문
우리 삶의 목표가 부정적인 에너지 형태를 긍정적인 에너지 형태로 바꾸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응답
예, 제 생각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저는 실제로 부정적인 에너지를 흡수한다고 느끼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것이 괜찮을까요?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내가 대상에 대한 관찰을 시작했을 때, 갑자기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고,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예를 들면 좀 덜 친한 친구의 생각으로 바뀌곤 합니다. 그때 나는 거부감을 느끼는 데, 그 친구 생각으로 정해진 시간까지 계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원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시간의 그 거부감을 흡수해야 할까요?

응답
수행의 초기에는, 만약 마음 수행이 되지 않았다면, 마음에는 많은 다양한 종류의 생각과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초기에 당신이 거부감을 느꼈을 때, 거부감을 알아차리고 다시 수행으로 돌아 가는 것이 좋습니다. 명상 기술의 모든 것은 연습(수행)을 일으키는 것이죠. 만약 우리가 어떤 기술을 개발하기를 원한다면, 단숨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해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 다시, 또 다시, 천천히, 천천히 반복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의 무언가가 천천히 바뀝니다. ‘우리도 그것을 할 수 있다’는 마음의 한 단계를 갑자기 알게 되고, 그 다음 단계를 위해 또 몇 달이 필요합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계속 합니다. 그러나 너무 길게 하지는 말고 휴식하고 다시 하고, 그렇게 그냥 계속합니다. 우리가 시도와 실패를 천천히 반복하면서 ‘너는 성공할 거야 나는 영적인 천재는 아니지만, 인내와 관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라는 힘을 기르게 됩니다. 우리는 그냥 계속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질문
스님께서 좋은 것을 줄 때, 그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고, 만약 그것이 진실로 자신감 혹은 평화와 같은 당신이 실현하고 싶은 것이라면 괜찮나요? 만약 있다면 특별한 통로가 있는지?

응답
물론이죠, 왜냐하면 평화와 자신감은 우리 본성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처럼 넓고 경계 없는 창고로부터 그들(자신감과 평화)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고갈되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본성은 중심도 없고 끝도 없는 하늘에 비유되며, 성취하며, 관대하여,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포기해도 결코 우리의 재고가 바닥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성은 양질의 수준으로 가득하므로 우리 스스로 원하기만 하면, 저절로 착해지고 저절로 자비로워지며 저절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순간에 본성과 닿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 줄 혜택이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또 다른 활용으로는 좀 더 현대의 수정명상(수행)인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졌죠. 우울한 사람이나, 자기 인상에 자신감이 낮은 사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떨쳐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통런 수행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5살에 성폭행을 당했던 제 어머니와 같은,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어려서 부모를 잃었거나, 끔찍한 일을 당해서 심리적 장벽을 만든 사람들에게 그 당시 자신의 사진을 가지고 통런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극복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끊임없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가시화를 통해, 천천히 그 장벽과 고통을 없애는 것을 돕습니다. 가시화는 매우 강력합니다. 일상의 개념적 생각을 버림으로써 얻는 에너지는 매우 강력한 마음의 기술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며, 명상으로써 가치가 있는 이유입니다. 비록 당신이 매우 훌륭한 수행자로 높은 단계이더라도 엄청난 양의 가시화 수행을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가시화는 개념적 생각을 통해 도달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깊은 심리 단계에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념적 사고를 이용해서 고통을 들숨으로 받아들이고 날숨으로 내보내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말할 필요 없이, 그것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질문
제 여동생에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고 때때로 신경질적으로 긴장을 합니다. 그녀는 어떻게 스스로 통런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제가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응답
먼저 그녀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지 보세요.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녀에게 좋겠다고 해서 그녀에게 수행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두려움은,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지에 대한 개념을 가시화 함으로써, 또 그녀의 두려움의 내용을 경험한 사람을 생각함으로써 두려움을 직면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심리적 장애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나 자신만의 두려움으로 붙잡혀 있는 대신,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은 마음을 열고, 두려움을 녹여 없애는데 도움이 됩니다. 두려움은 우리 자아에서 나옵니다 이 자아는 매우 겁이 많은 가상의 마음입니다 자아를 줄임으로써 파괴할 수 있습니다. 자아를 줄이는 한 방법은 타인의 고통을 돌보면서 자비를 닦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체의 문제에 촛점을 맞추기 보다는 마음을 열고 다른 모든 사람의 고통을 끌어 안는 것입니다.

질문
사실 좀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통런 수행에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스님께서는 매우 수준 높은 수행자이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있지만 저는 그 속에서 길을 잃을 겁니다. 이 수행이 스님으로 하여금 사랑이 생겨나는 대신에 경악하게 만든 특이사례는 없었나요?

응답
통렌 수행은 결코 당신을 경악케 하지 않습니다.

질문
또한 저는 제가 점령당한 것을 느낍니다.

응답
그것이 당신을 강하게 하지 않나요? 기본적으로 존엄성에서 기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비극은 우리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에 스스로를 너무 정체화시키는 것이므로, 우리는 단지 해야 할 역할이 필요하죠. 우리가 정말로 그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진짜 누군지를 생각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신이 전생의 당신을 만나면 당신은 ‘저 사람은 누구지?’ 하며 못 알아 볼 겁니다. 다음 생의 당신을 알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세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성별을 갖게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통런 수행이 전형적인 나의 생각을 떠나게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질문
단지 왜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할 수 없는 지가 궁금했습니다.

응답
수행 초기에는 마음을 인식하기 때문이고, 수행을 계속 함에 따라 원하는 한 가능합니다.우리가 거부감을 지켜볼 때나 거부감을 인식할 때, 그 속에서 상기시키는 것 없이 그냥 인식합니다. 우리 마음이 익숙하게 되어, 확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대부분의 명상은 마음이 지치고 두려움이 생기는 긴 시간보다 집중하기 좋은 짧은 시간이 좋습니다. 우리가 어떤 운동을 할 때처럼, 짧은 시간 집중하고 중간마다 휴식을 취하면 좋습니다. 더 이상 고행자처럼 명상하지 마세요.

질문
저는 가시화를 잘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에게 일어나는 일은 내가 고통을 흡수하고, 마음을 열고, 다시 힐링 하려는 의지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신체적 감각은 이것을 느끼는데, 마음(정신적) 상이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제 질문은, 제가 정신적 상을 위해 더 훈련해야 하나요? 아니면 신체 감각 느낌의 의지에 계속 집중해도 좋은지요?

응답
가능한 실제 사람을 생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긴장이 완화됩니다. 그것은 대상이 정확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아파서 병원에 있고, 당신은 그 앞에 앉아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다면 통런 수행을 하면 됩니다.’ 혹은 다른 사람의 사진을 이용해서 그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실제로 그 사람을 생각하게 하고 그래서 그가 특별하게 됩니다. 점차로 그 활용을 넓힐 수 있게 되며, 결국 당신이 원한다면 전국민에게까지 가능합니다. 수행 초기에는 그것이 추상적이지 말아야하며, 확실하게 구체적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수행은 우리 의식의 더 깊은 수준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것이고 상호소통하는 생각에 의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훨씬 더 깊은 레벨로 닿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래서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