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의 Social Justice
14th Sakyadhita, Dharma Talk, 24 Jun 2015
강연 | 아잔 브람 스님 Ven. Ajahn Brahm
번역 | 이유민
*이 글은 아잔 브람 스님이 제14차 샤카디타대회에서 하신 법문을 녹취한 것이다
존경하는 승가 그리고 재가 불자 여러분! 여기 비구스님은 몇분이나 계신가요? 저기 한 분, 저기 또 한 분, 저까지 모두 네 명 비구스님이 여기 있군요. 비구와 비구니, 우바이와 우바새로 이루어진 사부 대중을 여기서 볼 수 있다니 참 좋습니다. 마치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요.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로 했을때 서원했던 대로,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세상을 다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정말 고무적인 일입니다. 나는 우리가 항상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스스로를 고무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색깔의 승복을 입고 있지만 속은 같습니다. 사람들이 불교 전통 간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그저 다른 데코레이션이 올려진 케이크와 같다고 합니다. 티벳 전통은 딸기 장식[붉은색 법복을 가리킴]이 올라가 있고요. 저는 밀크 초콜릿입니다. 한국의 승려들은 블랙베리, 아니면 바닐라라고 할까요? (웃음) 그 밑에는 같은 케이크,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재합니다. 물론 이 가르침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지만 그 안에는 오직 이 세상에 존재하는 행복과 자비심으로 가득합니다.
좀 전에 한국에서는 저를 보살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웃음) 싱가폴에서는 겉은 테라바다 승려인데 안은 마하야나 승려 같다고 말합니다. 저는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까도 차를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한대로 저는 항상 제가 할 수 있는 한 무언가를 합치는 일에 정성을 쏟으려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요. 그래서 저는 히나야나와 마하야나를 한데 묶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묶어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히나야나에서 ‘ㅎ’을 떼고 마하야나에서 ‘하’를 떼서 와나야나에서 ‘야나'를 떼면 ’하하야나‘가 됩니다. 그것이 제가 따르는 전통입니다. 하하야나 불교요.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행복이나 미소, 웃음을 사람들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오래 전 티벳의 한 스님으로부터 배웠는데요, 그 분은 법문을 할 때 사람들을 웃게 하면, 그래서 사람들이 입을 열면, 그 때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알약을 집어넣을 찬스라고 하였습니다. (웃음) 사람들이 웃는다는 것은 그만큼 집중해서 듣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오늘 저녁 저의 법문 주제는 자비심과 정의입니다. 좋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가 하나 떠오르네요. 이 이야기는 제가 특히 정의라는 것이 불교 맥락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고 할 때에 자주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교도소을 자주 방문할 때의 일입니다. 제가 호주의 한 교도소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그 이유는 수감자들이 명상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였습니다. 제가 그 호주 남서쪽에 있는 교도소에 가보니100명이 넘는 죄수들 중 거의 95명 정도가 왔습니다. 제 명상 수업에 빠진 사람들은 아프거나 문제를 일으켜서 수업에 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뿐이었어요. 수감자들이 이렇게 많이 명상을 배우러 오다니! 저는 무척 고무되어 할 수 있는 한 가장 잘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수업을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수감자들 중 한 명이 일어나 질문을 했습니다. 그 죄수는 키가 6.6피트나 되고 덩치도 크고 온 몸에 상처 자국이 나 있었어요. 그런 사람이 당신이 하던 말을 끊고 질문을 할 때에는 이렇게 대답해야 하죠.. “네, 질문이 뭡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제 질문은요, 명상을 하면 공중을 날수 있다는데 정말입니까?” (웃음) 그 순간 저는 왜 그렇게 많은 죄수들이 내 명상 수업에 왔는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탈옥을 하기 위해 명상을 배우러 왔던 거예요! 이건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직접 겪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탈옥을 하는 명상을 배우려면 아주 많은 세월이 지나야 합니다. 몇 해가 걸릴지 몰라요. 그건 아주 특별한 명상이니까요” 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아주 실망해서 그 다음 번 제가 갔을 때는 오직 3명의 학생들 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하루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사이에 죄수들과 잘 아는 사이가 되었지요. 이런 만남들은 저에게 많은 배움을 줍니다. 그 나이든 죄수가 저를 만나서 말하길, “아잔 브람 스님, 저는 당신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는 “나는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이 감옥에 왔어요. 나는 강도죄로 수배되어 감옥에 왔지만, 그 도둑질은 절대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에요.” 그러면서 “여기 갇힌 사람들이 당신에게 때로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알게되었습니다. 호주의 감옥이라고 할지라도 죄수들이 간단히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럴 권리를 가지기 어렵고, 돈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어요. “나는 변호사들을 꽤 많은 알고 있다. 그를 도울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절로 돌아가서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해서 이 불의를 해결해야 할지 벌써 생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지요. “스님, 제가 이 감옥에 들어오게 된 그 죄를 저지르지 않은 건 맞는데요. .. 그런데 제가 저지른 다른 범죄들이 있어요. 그 때 저는 잡히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이렇게 된 게 공평한 일인 것 같아요.”(웃음)
그는 저에게 카르마의 법칙을 설명하고 있었어요! 가끔 우리는 이건 공평하지 않고, 이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이 말이지요. 우리는 항상 그게(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만 벌을 받는 것이)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못하고 나서 걸리지 않아 벌을 받지 않은 일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그것도 정의롭지 않은 것이죠,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카르마는 균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나는 어쩌면 그것이 공평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큰 그림을 본다면요. 그렇지만, 당신이 저지르고 벌을 받지 않았던 일에 대한 벌로 카르마의 법칙이 작용하여 당신 앞에 불의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불교 승려나 재가자의 책임을 생각한다면, 그저 수동적으로 “오호라, 이것이 카르마이니 그저 가만히 있어야겠다.”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에요. 제가 법문이 끝나고 이 무대 위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카르마의 법칙을 방해해서는 안 돼. 구급차를 부르지 말고 아잔 브람 스님이 병원에 가서 치료받도록 하지 말자. 그려면 카르마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 될 테니까.” 라고 하실 겁니까? (웃음) 그건 우스운 일이지요. 제발 그렇게 하지 마세요. 만약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회적 불의 속에서, 불자로서 당신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면, 부디 그 변화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해보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불의(不義) 중 하나가 뭡니까? 그건 여성들이 대우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로서 평등이 이루어질 법한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2월에 제가 구글 인사부에 방문했을 때입니다. 승려가 되면 이렇게 구글 본사와 같이 재미있는 장소에 법문을 하러 가게 되지요.(웃음) 거기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구글처럼 현대적인 회사에서도 여성 엔지니어가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남성들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이라고 불리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보세요, 당신들은 캘리포니아,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당신들은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제안을 했지요. “가끔은 항의도 해야 합니다. 가서 변화를 일으키세요.” 그래서 제가 잘 아는 차드 멍 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만약 이 월급을 결정한 사람들이 바뀌지 않으면, 가서 나이든 남자를 한 명 데려다가 여자처럼 옷을 입혀서 일을 하게 하세요. (위스커는 위스커를 만듭니다) 그렇게 하면 뉴스에 날 거에요. 그러면 구글이 당황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실제로 변화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수치의 힘은 사회를 변화시키죠.” 라고 했습니다. 가끔 우리는 그렇게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 필요가 있어요. 그들이 잘못을 하고 있을 때 말이죠. 그건 폭력적인 게 아니에요. 변화를 만드는 것이죠.
자, 성평등의 문제와 함께, 이런 것을 인도네시아에서 말해도 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나니까 꽤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말하겠습니다.(웃음)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문제가 있습니다. 게이, 레즈비언, 트렌스젠더인 사람들을 알거나 만난 분들이 계실 지 모르지만, 그들 역시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성적인 지위에 관해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는 여기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전 게이도 아니었고, 승려가 되기 전에 여자친구들도 있었고, 어렸을 때는 게이들을 무서워하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이 문제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은 승려가 된 다음부터입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서게 되면, 당신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차별받는 사람을 위해 나서게 되니까요. 저는 언젠가 한 번 법문이 끝나고 저에게 찾아온 노인을 만났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호주 서부에 있는 게이 커뮤니티의 리더입니다.” 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종교는 항상 우리 단체에 무관심했지요.” 라고, 저의 자비심의 심장에 그대로 와 닿을만한 커다란 고통을 지닌 채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도 이런 일을 참을 수 없습니다. 무언가 해야만 합니다.” 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게이, 레즈비언, 트렌스젠더 커뮤니티에 개인적으로나 아니면 공적으로 도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게이들 모임의 아침식사에 초대되었을 때, 저는 그 초대가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호주의 종교인 리더 중 적어도 한 명은 약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었지요.
그 아침식사에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현대적인 사람이고, 여기에 계신 여러분 앞에서 예의를 벗어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지만, 이 이야기는 호주에서 게이-레즈비언-트렌스젠더 커뮤니티가 수치심을 이용하여 변화를 만들어낸 이야기라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테스마니아 주에서 있던 일입니다. 테스마니아 주는 호주의 마지막으로 남은 주로서, 게이들의 관계를 범죄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방 단체들이 정부에 항의했죠.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합니까?” 그러자 주지사는 말하길, “걱정 마십시오. 그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보지만 않는다면요.” 물론 이건 충분한 답이 될 수 없지요. 그래서 테스마니아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어떻게 정의를 실현했느냐고요? 이미 몇 년이 넘도록 관계를 유지해온 50명 정도 되는 커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룻밤 날을 잡아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위법을 했지요. 그리고 그들이 한 일을 모두 적어서 그 다음날 아침 스스로의 손으로 경찰에 그 문서를 건넸습니다. 그들은 범죄를 저질렀지요. 법에 따르면요. 그리고 경찰은 그들 모두를 체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언론에서는 이 일을 알아챘고, 신문의 일면과 TV 채널에 뉴스가 났습니다. 정부는 아주, 아주, 당황스러워했지요. 그래서 그 다음주에 그 법을 철회했습니다.
때로는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정의를 옹호하는 일 말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당차게 일어서서 “나는 비구니가 되겠다.”고 말한 모든 여성들이 저는 아주, 아주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당신의 전통을 따르는 모든 고승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이 정의임을 알고, 당신이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구니 수계는 불교 전통에 따르는 것이고, 가장 초기 전통에 따르는 것이므로 우리는 해야 합니다. 수계를 옹호해야 합니다. 만약 비판을 받는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제 스승님인 아잔 차 스님은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비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누군가 너를 개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너를 개라고 부른다면, 꼭 엉덩이를 한번 보아라. 그리고 꼬리가 있는지 확인해라. 만약 꼬리가 없다면, 너는 개가 아니니,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 당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신이 있는 한, 부디 계속 그 일을 해나가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당신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당신 뒤를 따라 비구니가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비구니가 되겠다”고 말할 만큼 용기가 있었던 모든 사람들, 당신들은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역사가 쓰일 때, 불교의 사라진 역사가 다시 세워지기까지는 수십 년, 그리고 또다시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만약 당신이 우리가 비구니 수계를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일말의 의심이 있다면 해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인도네시아에서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웠는데요.
부처님께서 보리수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하신 생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라가 와서 부처님을 유혹하면서 말합니다. “이제 당신이 깨달음을 얻었으니,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가르치지는 마십시오.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주 골치 아픈 일입니다. 그저 명상하여 해탈에 도달하십시오.” 그러자 부처님은 “아니다. 나는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로 이루어진 사부대중을 세울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며칠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예화는 부처님이 사부대중을 세우고자 하는 계획을 아주, 아주 초기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의도였습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의 승단을 세우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열반에 들기 세달 전, 마라가 부처님을 다시 한 번 찾아왔습니다. “이제 열반에 들 때가 되었군요. 비구 승단은 크고, 비구니 승단도 크고, 잘 만들어졌고, 몇 천 명이 넘는 우바이와 우바새가 있으니 말이죠.” 부처님은 “그렇다. 네가 옳다. 과업이 이루어졌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깨달음뿐만이 아니라 부처님의 뜻을 실현하는 데에 내 힘을 보태지 않는다면 비구로서, 스승으로서, 나의 삶이 완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부처님은 아마도 더 많은 비구니들이 이 세상에 나기를 요구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단지 수계 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기로 가끔씩-이 말을 하는 저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라며-티벳 전통에서는 비구니들에게 수계를 준 뒤 그들을 전혀 훈련받지 않은 채로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놔두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한 일이 호주에서 일어났음을 알고 있으며 이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계를 준다면, 당신은 그들을 돌보아야만 합니다. 수행을 시키고, 가르침을 주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이 아기를 돌보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아기를 기른다면, 아기가 저절로 크도록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힘든지 상관없이 당신은 아기를 키워야 합니다. 학교에 보내고, 교육을 시키고, 좋은 시설을 제공하고, 그래서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무를 심어만 놓는 것과도 다릅니다. 나무를 보호하고, 비료를 주고, 물을 주어서 나무를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가 아주 튼튼해져서 스스로 자랄 수 있게 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당신은 나무를 혼자 놔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구니에게 수계를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잘 양육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것이 저의 일이고, 그것이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제가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이곳 대회장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고(웃음), 다른 몇 명의 비구 스님을 보면서 무척 반갑기도 한 이 곳에 말입니다. 여기에 와보니 좋은 점이 있습니다. 제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거의 화장실이 비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 남자 화장실을 우리 몇 명 안 되는 비구들만 쓰기 때문이지요.(웃음) 저는 언제나 긍정적인 면을 봅니다.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바로 비구니들을 돌봄으로써 비구니 승단이 강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비구니 수계를 받은 여러분들은 훈련이 필요하고, 머무를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소속되었다고 느낄만한 곳 말입니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간소한 절이면 됩니다. 그것이 평등이며 그것이 정의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정의는 이 세상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제가 말한 바와 같이, 만약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부디 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실 수 있도록, 제가 불교 경전이 아닌 실제 삶에서 들었던 유명한 이야기 하나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일 년 동안 학교 선생으로 일할 때의 일입니다. 누구라도 서양에서 일 년 동안 십대들을 가르치다 보면,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되는 길을 택하고 싶어집니다.(웃음) 정말 일이 어려워서, 저는 학교를 떠나서 비구가 되었습니다. 내가 일했던 학교의 동료 선생님들 중에 나이 드신 영어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제2차 세계 전쟁 때 미얀마에서 일본 군사들과 싸웠던 분입니다. 그 분이 전쟁에 참여했던 시절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하루는 버마 정글에 정찰을 나갔습니다. 그곳에는 다른 5-6명의 병사들이 있었고요. 그들 중 한 명의 병사가 정찰을 나갔다 돌아와서는 모두에게 무서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많은 숫자의 일본 군대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둘러싸였고 숫자도 절대적으로 불리했습니다. 전쟁터 한가운데에서요. 그는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누가 영웅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는 영웅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길을 찾아 싸울 겁니다. 누가 압니까? 아마 우리 중 누군가는 성공해서 살아남을 겁니다. 만약 우리 모두 죽는다면, 우리는 최대한 많은 적들을 우리와 함께 죽음으로 데려갈 겁니다. 그것이 남자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상관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대신 “우리 모두 앉아 차 한 잔 하자”고 했습니다. 어찌됐든, 영국의 군대였으니까요[영국사람들은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기에]. 그는 이것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멍청한 짓이라구!” 어떻게 미얀마의 정글에서, 세계대전 중에, 적들에게 둘러싸여 죽기 일보 직전에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실 수 있습니까? 미친 일이죠. 그렇지만 그는 차 한 잔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정찰대가 돌아와 말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빨리 치우십시오. 적들이 움직여서 길이 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적군이 둘러싼 와중에도 틈새를 찾아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게 이야기를 한 이유였죠. 그는 그의 상관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게 없다면, 만약 불의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 없는 때라면, 도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렇다면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요. 만약 차를 마시지 않는다면, 커피를 마시세요. (웃음) 그렇지만 싸우지는 마세요.(웃음) 왜냐하면 상황을 악화시킬 따름이니까요.
그리고 가끔씩 세상의 불의와 싸워야 하지만 적합한 때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물러서서 고요함을 유지하며 쉬세요. 그리고 때가 오면, 당신이 가진 모든 힘을 다하세요. 제가 지금 말씀드릴 두 번째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처럼요.
호주에 사는 어떤 남자분이 해준 이야기입니다. 그는 나의 스승인 아잔 차 스님을 뵈러 사원에 오곤 했습니다. 그는 아잔 차 스님이 매우 유명한 스님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중요한 질문을 나의 스승에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태국 동북쪽에 있는 그 사원에 도착했을 때, 스승님은 그 남자처럼 질문을 하고자 하는 이백 명 가까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2시간쯤 기다리다가 질문하러 기다리는 줄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아잔 차는 너무 유명해서 안되겠다.” 그는 그만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아오려는 길에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가 한 시간 내에는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많은 스님들이 절 마당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도, “적어도 내가 뭔가를 할 수 있겠다.” 하면서 빗자루를 집어 들고 쓸기 시작했습니다. 마당을 쓸고 있었는데, 그는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손은 아잔 차 스님의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승려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리고 스님은 이 남자가 그 먼 길을 온 것을 보고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잔 차 스님은 그에게 이 말을 해주었습니다. “만약 네가 마당을 쓸 거라면, 네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라.” 그리고 스님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 호주 남자는 위대한 비구나 비구니로부터의 이런 가르침을 받을 때, 그것은 단지 사원을 깨끗이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내 그는 그 의미를 알아채고, 호주 시드니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하던 일에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사무실에 있을 때에는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을 때에는 사무실이나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명상을 할 때는 가족도 일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도 떠올리지 않았어요. 그는 명상에 전력을 다한 겁니다. 그리고 그가 밤에 잠이 들 때는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잠자는 것에 온 힘을 다했죠. 그리고 그가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을 때, 그의 사업은 굉장히 성공적이었고, 훌륭한 가족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명상 시간은 너무나 평화로웠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갔습니다. 그 간단한 가르침 덕분에요. 그러니 뭔가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앉아서 차 한 잔을 드십시오. 하지만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정의를 위해, 자비심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야 합니다.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한 사람, 한 사람, 특히 비구니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권하는 이유입니다. 어떠한 사회적 정의 이슈와 관련된 일이든 가서 전력을 다하십시오. 사람들에게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나는 세상을 바꿀만한 힘이 있는 사람을 바꾸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내가 몇 가지 제안을 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극단적인 것들을 제안하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할 때 비구니 수계에 관한 것조차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말들을 하지요. 테라바다 전통에서 비구니 승단을 시작하는 것은 극단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했다는 이유로 저는 파계를 당했지요. 그러나 저는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국 사람들에게 오직 한 번만 파문을 당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아잔 간하,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여러 스님들이 파문을 당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파문을 당하면 삶에서 아주 성공을 하는 것 같아요. 이력서에 쓰면 참 보기가 좋습니다.(웃음)
당신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보면 그것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항상 특히 요즘 같은 때에 사람들에게 말하길 좋아합니다. 태국의 나의 본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이죠. 제가 수계를 했다는 이유로 심문을 당하던 때입니다. 지금 제 눈앞에 제가 수계를 준 비구니 스님이 앉아 계시는군요 (테라바다 비구니스님)! 정말로 잘된 일입니다. 저는 정말 당신을 옹호했던 일이 정말로, 진짜로, 행복합니다!
세 시간 정도의 심문 후에 질문은 하나로 좁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잔 브람, 당신이 만약 이 승려들 앞에서 2009년 10월에 수계를 받은 비구니들의 수계가 무효였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진짜 비구니가 아니라고 한다면, 당신은 용서받을 것이고 우리는 당신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해줄 것이고 함께 자란 친구들도 모두 당신의 옆에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진짜 비구니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파문을 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쉬운 길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당신의 원칙을 위해 앞으로 나설 것이냐’하는, 그런 선택을 종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저를 고통스럽게 할지 알았지만 저는 원칙 쪽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많은 친구들을 잃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몇 년을 함께 지낸 사람들을요. 그래서 나는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저 분들은 비구니입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비록 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요, 당신은 당신의 진실을 따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 순간을 돌아볼 때에, 내가 만약 굴복했다면, 내가 만약 그들이 비구니가 아니라고 하며 쉬운 길을 택했다면, 나는 절대로 행복한 승려로서 죽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언제나 후회했을 겁니다. 그 때는 정의를 위해 일어서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의 순간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 강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좋은 불자라면요. 부처님은 절대 마라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부모에게도요. 그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한 내면의 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헌신하기로 결정한다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으십시오. 그것은 어떤 분야의 정의에도 모두 해당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영향력도 미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몇몇도 그러한 특권을 가진 위치에 있습니다. 텐진 빠모 스님, 당신은 유명한 비구니입니다. 아주 많이 존경 받고 계시지요. 그리고 각자의 나라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다른 비구니스님들이 이곳에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죠. 부디 그러한 위치를 잘 사용하십시오. 우리의 세계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앞당기기 위해서요.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리더와 접촉할 기회를 가지셨을 겁니다. 제가 재계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은 아닐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때때로 사람들은 우리의 세상을 바꾸는 힘이 정치가와 행정부의 수장에게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세상의 많은 힘들이 큰 사업체의 CEO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것이 제가 구글에 가자마자, 그곳에 간 것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로 삼은 이유입니다. 힘이 있는 회사들의 CEO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들이 우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요.
이제 그 뿐만이 아니라, 정치인들까지도 만납니다. 저는 대통령, 수상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저를 존경하기 때문이고, 또 경계를 풀고 일대일로 만나니까 그들이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당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겁니다. 현대 정치가들은 저에게 그들이 무언가 이 세상에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일을 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합니다. 부디 각자의 나라의 정치 시스템에 좀 더 개입해주십시오. 그래서 위대한 지혜와 자비심, 세상을 돕는 전통을 나눌 수 있게요. 이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존재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알고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요. 하지만, 우리가 그것보다 좀 더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래된 격언이 있는데요, 이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격언을 써보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물고기를 준다면, 그 사람을 하루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그의 남은 일생 동안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고요.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불자라면, 당신이 한 사람에게 당근을 준다면 하루를 먹여 살릴 수 있지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남은 일생을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말해야겠지요. 저는 오래된 격언들을 좀 더 불교식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왜 실제로 변화하지 못하겠습니까? 정치에 적용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저는 실로 미친 것과 같이 보이는 제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미친 것 같은 방법이고, 효과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말이지요, 영어에서 정부에서 일하기 위해 선거에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candid(후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candid는 white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왔습니다. 왜냐하면 2000년 전에 로마 제국에서는 로마 의회에 후보자로서 사람은 덕목의 상징으로서 흰 옷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들은 고대의 법에 의해 정부의 일꾼으로 뽑혔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무엇을 할지를 약속을 해서가 아니라,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느냐에 따라서 말이지요. 현대 정치에서는 인도네시아든, 특히 미국이든, 유럽이든, 호주든, 미래에 후보자들이 무엇을 해줄지를 보고 투표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약속을 깨지요. 그러니 우리는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아니라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불자로서의 덕목을 갖춘 사람을 뽑는다면, 아니면 그 사람이 이슬람이든, 기독교이든, 우리는 좋은 가치를 퍼뜨릴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경제나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사람들 대신에 그들이 무엇을 해왔는가에 따라서 투표를 하도록 권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방법이 우리가 정부를 바꿀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방법을 다른 분들에게 제안해주십시오.
불교 승려들이 실제로 바깥에서 말할만한 제안들입니다. 그저 조금 더 재미있게만 하면 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든 불교 전통에서 비구니 승단을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우리 불교 전통이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불교를 공부하면서, 부처님이 승가를 위해 말씀하신 가장 위대한 말씀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전에 한 질문, 이제 승가는 누가 이끌어 나가야 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하신 대답입니다. 그 대답을 여러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불법(Dhamma)과 율장(Vinaya)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당신을 인도할 것입니다. 어떤 다른 남성도, 여성도, 어떠한 비구도, 비구니도 당신을 이 순간부터 이끌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저 가르침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교황과 같은 존재를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승려들이라 하더라도 그 분들을 우리가 조용히 따르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종종 말하곤 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승단을 다시 세우는 것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위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이것을 마하 나야카(Maha Nayaka)라고 부릅니다. 요즘 사람들이 스리랑카에서 어떻게 마하 나야카 들이 있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이것은 저의 조상들, 즉 영국사람들이 지배할 때였지요. 영국 사람들은 아주 교활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그토록 강력한 제국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영국인들이 스리랑카에 갔을 때, 그들은 스리랑카의 승려들이 (그때에 비구니 승려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존경했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승려들의 존재는 스리랑카의 영국인들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얼 했을까요? 영국 정부는 그들이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은 몇몇 승려들을 뽑아서 마하 나야카라는 지위에다가 그들에게 권력과 돈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영국 군부가 스리랑카의 승려들을 조종했던 방법이고, 그걸 통해서 승단이 사람들을 조종하도록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영국 군부가 스리랑카 사람들을 조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방법이었고 그것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누가 누구를 조종하느냐에 관한 것이고, 이것이 지금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저에게 아주 혁명적이고 반항적인 승려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전통을 따릅니다. 저는 테라바다 전통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보수적인 승려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갑니다. 영국 군대의 전통이 아닌 부처님의 전통으로요. 그리고 부처님의 전통에서 부처님의 세우신 바와 같이 모든 절은 각각 독립적입니다. 그것은 힘의 혁명입니다. 그들이 율장의 규칙을 따르는 한,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위한 결정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호주에서 네 명의 비구니를 수계 주기로 한 결정이 해당 절을 제외하고 다른 사원을 이끄는 누구와도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에 의해 세워진 율장에 따른 우리의 결정이었습니다. 우리의 선택이었어요. 우리가 바로 그 선택을 만들어냈습니다.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효합니다. 그것이 불교 전통에 힘을 싣는 일입니다.
모든 사원들이 독립적이기에 개선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각 사원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스스로를 바꾼다면, 그 사원은 성장하고,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것이 몇 천 송이의 꽃이 핀다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몇 천 송이의 꽃이 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것은 많은 장소에 씨를 뿌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씨가 꽃을 피우는 곳은 아름답겠지요. 많은 다른 장소들에서 그것은 꽃을 피우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개선을 위한 자유의 씨를 뿌려서, 새로운 것을 시도함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으로 자비심과 정의를 이 세상에서 실현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힘을 빼앗기보다는, 힘을 주기 위해서요. 여성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선택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곳에 완전히 속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지시하는 것은 정말 하고 싶지 않거든요. 힘을 가지고 그것을 휘두르려고 하는 승려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부디 저를 명예 비구니로 봐주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으므로, 우리가 그러한 자립성을 가지고 있을 때, 각 커뮤니티에서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승려들이나, 캘리포니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방글라데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베트남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정의가 무엇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힘의 해체는 초기 불교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정의 중에서 특히 사회 정의를 정립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더 나은 세상, 더 친절한 세상,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우리가 여성들의 힘을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나는 남성으로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태국의 여성들을 empower 시킨다면, 여성에 대한 착취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하는 어떤 사회학자의 논문을 읽었습니다. 태국의 매춘과 섹스투어리즘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태국은 불교의 전통을 지닌 자비로운 국가여야 할 것인데, 왜 아무도 이것에 대해 무언가를 하지 않습니까?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남성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성들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많은 여성들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그 순간부터 제가 말한 문제들은 설 곳을 잃을 것입니다. 성매매에 관한 해결책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마도 스웨덴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제 스웨덴에서는 성매매가 불법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창녀라면, 그것은 죄가 아니에요. 죄에 대한 책임은 성매매 여성을 찾아가는 남성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걸리면 감옥에 갈 사람들이에요. 결과적으로 그 법은 굉장히 현명한 방법이었던 걸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성매매 여성들을 탓하고 그들을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몰아가지만, 이제 그들을 찾아가는 남성들이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이 되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아이디어입니다. 태국에서 그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남자들을 감옥에 보내고, 소녀들은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요.
마찬가지로, 사형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태국, 싱가폴, 미얀마와 같은 불교 국가에서 왜 사형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인도네시아는 불교 국가는 아닙니다. 다수가 아니지요. 불교는 그저 소수에 불과합니다. 왜 우리는 불교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사형 제도를 유지하도록 놔두어야 합니까? 사람들은 사형 제도를 시행한다고 해서 범죄가 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같은 승려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비구 비구니들이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장난처럼 여길 일이 아닙니다. 때때로 유명한 집안의 사람들이 사원에 찾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사원을 위한 보시금을 받고 좋은 말을 해주는 대신에, 그들에게 정확한 지적을 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는 지난 6월에, 한 두 달쯤 전이었던 것 같은데요. 스리랑카에 가서 법문을 했습니다. 대통령의 부인과 아들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대통령을 만나 기회를 잡았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안녕하시냐고, 어떻게 지내시냐고 인사하는 대신에 그의 부인과 아들에게 “당신들은 스리랑카의 비구니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그들을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자 그분들이, “아, 예, 저희가 잘 돕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아니오, 당신은 그들은 돕고 있지 않습니다.” 대중 앞에서 대통령에게 무안을 준 셈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승려로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제가 이미 파문 당한 승려이기 때문이고 (웃음), 다른 한 가지는 제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파문을 당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자유를 갖게 되는 일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아닙니다, 정부는 승려들의 사원을 지원하고 저는 돈을 냅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아니요, 스리랑카 승려들의 사원에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세요, 그들은 비구니 사원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평등하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반은 여성이고, 많은 사람들이 비구니 승려를 돕기 위해 그 세금을 냈는데,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불행히도, 그 정부는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있습니다. 저는 유명세를 탔고,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용할 겁니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중요한 사람을 만난다면, 말씀하세요. “이것은 불평등한 일이며, 정의가 아니다”라고요.
싱가폴과 태국에 사형제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 국가에 적합하지 않은 제도입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미얀마에서 어떤 종교가 어떤 형태의 착취를 당한다면, 그것은 불자에게는 옳은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아는 바를 행하기 위해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옳은 것을 옹호하기 위해 일어설 때, 많은 형제 자매들이 당신 옆에 서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항상 비구니 수계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나아가는 방향에 서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갈수록 쉬워질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태국에게 멋진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태국에서 9년을 살았으며, 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그곳에서 자란 9년이라는 시간은 바로 희망이었습니다.
저는 태국 불교에 그토록 많은 스캔들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무척 슬픕니다. 저는 승려들이 그것을 고칠 것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비구니들이 우리를 위해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가서 저항하십시오. 성매매에 대항하여, 사형제도에 대항하여, 당신이 만나게 되는 어떠한 차별에 대항하여 말입니다. 비구와 비구니, 우리는 정치적이어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저는 말합니다. 저는 테라바다 승려로, 자비로운 보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끔 대승불교의 보살처럼 밖으로 나가 행동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저는 테라바다 승려인데 말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깨달음을 향해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힘들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함께 저항해주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불자로서 우리의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고통과 그러한 고통을 끝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고통을 끝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고통 역시 없앨 것을 의무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정의를 위해, 평등을 위해, 이 세계의 폭력이 사라질 수 있도록 저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자들이 충분히 잘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 부디 제 옆에 서서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