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특집 #1] 걷기명상에 대하여 – Tricycle 기사

걷기명상에 대하여(Walking: Meditation on the Move)

아잔 차 스님, 실비아 부어스타인, 하쿤 야스타니 로시, 존 카밧진, 틱낫한 스님, 조안 할리팍스, 브루스 채트윈, 헨리 데이빗 소로, 마쓰오 바쇼 등 아홉 명의 지도자와 저술가들의 걷기명상에 대한 글을 소개 한다.

* Tricycle 기사 원문: https://tricycle.org/magazine/walking-meditation-move
* 번역: 문윤형, 박미선, 법현스님, 시현스님, 원혜영, 유정스님, 이선아, 이영희, 정진옥 (가나다순, 9명)

1984년 인도 라다크, 원으로 걷기 by Richard Long

1. 아잔 차 스님 ACHAAN CHAH (번역: 문윤형)

태국의 아잔 차 스님은 걷기명상을 통해 마음챙김을 수련한다고 이야기한다.

날마다 걷기명상을 하자. 시작하기에 앞서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 아주 약간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손을 앞쪽으로 쥔다. 보통의 속도로 길의 한쪽 끝부터 반대쪽 끝까지 걷는다. 길을 걷는 내내 자신을 알아차리도록 하자. 이제 멈추고 돌아온다. 만약 마음이 산란하다면 가만히 서서 마음을 모은다. 마음이 여전히 산란하다면 호흡에 집중한다. 그리고 반복한다. 이렇게 개발된 마음챙김은 항상 유용하다.

몸이 지치면 자세를 바꾼다. 하지만 자세를 바꾸고 싶다는 충동이 들자마자 해서는 안 된다. 우선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알자. 육체의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산만하거나 게으름 때문인지? 신체의 괴로움에 주의를 기울이자. 솔직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는 법을 배우자. 수행에서의 노력이란 마음의 문제이지, 몸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다시 말해 마음속에서 좋아함과 싫어함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따라가지 않고 무엇이 일어나는지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을 뜻한다. 만약 이런 식으로 알아차리지 않는다면 밤새 앉아 있거나 걷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없다.

미리 정해놓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걸어 갈 때 약 2미터 앞에 시선을 고정하고 몸의 실제 느낌에 집중하거나 집중하거나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이라고 염불한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 일에 의문을 갖고, 그 일을 알아차리자. 진리는 생각과 느낌 그 이상이다. 그러니 진리를 믿거나 진리에 사로잡히지 말자.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과정을 그저 바라보자. 이것을 이해하면 지혜가 생긴다.

마치 전구와 불빛처럼, 의식이 일어나는 동시에 알아차려야 한다. 집중하지 않는다면 번뇌가 마음을 휘어잡을 것이다. 오직 집중만이 이에 대처할 수 있다. 도둑이 있기에 내 물건을 잘 간수하는 것처럼, 번뇌를 상기하는 것은 우리의 집중이 태만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한다.

잭 콘필드와 폴 브라이터가 엮고 편집한 『아잔 차 스님의 오두막(A Still Forest Pool: The Insight Meditation of Achaan Chah)』에서 발췌하였으며, 출판사(Theosophical Publishing House)의 허가를 받았다.

2. 실비아 부어스타인 SYLVIA BOORSTEIN (번역: 유정스님)

통찰명상(Insight Meditation)을 가르치는 미국인이 제안하는 걷기명상의 기본 안내이다.

공공장소가 아니고 복잡하지 않으며, 한 번에 10에서 20걸음 걸을 수 있는 정도 되는 곳을 선택한다. 야외라면 거리낌 없이 걸을 수 있는 한적한 곳을 찾는다. 실내라면 가구가 없는 공간이나 빈 복도를 찾는다. 그래야 걸을 때 발의 느낌에 모든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이는 특별한 걷는 연습이 아니라 주의집중과 평온을 수행하는 것임을 명심한다.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걸을 필요는 없다. 특별한 균형이 필요하거나 특별한 우아함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평범하게 걷는 것이다. 보통은 천천히 걷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통 걸음으로 걷는다.

길의 시작 지점에서 잠시 가만히 서 있는 것으로 걷기 수행을 시작한다. 두 눈을 감고 당신의 몸이 서 있는 상태를 느낀다. 어떤 이는 자신의 정수리에 집중하는 것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두 발이 지구와 연결된 감각을 느끼며 머리, 어깨, 두 팔, 몸통, 두 다리를 거쳐서 몸 전체로 자신의 주의력을 움직인다. 두 발바닥의 감각에 집중한다. 발바닥을 누르는 감각은 서 있는 장소에 따라서 ‘부드러움’이나 ‘딱딱함’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이제 앞으로 걷는다. 균형을 잡기 위해 눈을 뜬다. 나는 빠르지도 급하지도 않은 속도로 걷기 시작하는데, 같은 공간을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걸으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줄어들어 몸이 편해진다. 저절로 느려진다. 처리해야 할 자극이 적어지면 마음이 이완된다. 뭔가 새로운 걸 찾고 있는 탐욕적인 충동은 여러분이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는 것에 진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항복할 것이다.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걸을 때, 눈앞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걷는 속도가 느려질 때, 눈앞의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볼 수 있고 본질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걸을 때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에 자막을 쓴다면 다음과 같이 보일 것이다.

유유자적한 걸음: 걸음 ... 걸음 ... 걸음 ... 걸음 ...
두 팔의 움직임 ... 머리의 움직임 ... 미소 ... 바라봄 ... 멈춤 ...
돌아감 ... 새 지저귀는 소리 … 걷는 중 ... 걷는 중 ... 몇 시인가 생각하는 중 ...
지루하다고 생각 중 ... 걷는 중 ... 걷는 중 …
휘청거리는 팔 ... 따뜻한 느낌 ...
차가운 느낌 ... 그늘에 있어서 다행이야. ...
그늘에 머물기로 함 ... 미소 ... 걷는 중 ...

느린 걸음: 두 발에 가해지는 압력 ... 압력 ... 압력이 사라짐 ...
압력이 다시 나타남 ... 이동하는 압력 ...
가벼움 ... 무거움 ... 가벼움 ... 무거움 ... 가벼움 ...
헤이! 지금 나는 이 경지에 들어 왔어. 드디어 나는 ‘지금’을 느끼고 있어! ...
외침, 정신이 딴데 갔었네 ... 다시 시작해 ...
두 발에 가해지는 압력 ... 이동하는 압력 ... 가벼움 ...
무거움 ... 가벼움 ... 무거움 ...
들음 ... 따뜻함 ... 차가움 ...

천천히 걷는 것이 빠르게 걷는 것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것일 뿐이다. 속도와 상관없이 모든 것이 변하고, 직접 체험한 일시적인 경험은 당신이 일부러 천천히 걷는 동안에도 일어날 수 있다. 마음 챙김 걷기명상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집중이 제일 잘되는 속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속도를 올리거나 줄이자.

이제, 걷기명상을 해 보자. 처음은 30분 정도 한다. 기분 좋은 “딩”소리를 내는 타이머가 있다면 시간을 맞춰놓고 시작하자. 시계에 알람 기능이 있다면 타이머로 사용할 수 있다. 걷는 동안 시간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몇 번이나 발생하는지 주목한다. 시계를 보지 말자. 그저 걷자. 이렇게 하면 침착함과 주의력 외에도 당신은 깨어있음의 근본 요소인 열반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저자의 책 『Don’t Just Do Something, Sit There』에서 발췌하여 출판사(Harper SanFrancisco)의 허가를 받았다.

1975년 네팔의 숲길 by Richard Long

3. 하쿤 야스타니 로시 HAKUUN YASUTANI ROSHI (번역: 이선아)

일본의 선 불교에서 수행하는 행선(kinhin, 걷기명상)의 대가.

수행하다가 좌선을 끝낼 때 갑자기 일어나지 말고 몸을 양 옆으로 움직인다. 몸을 살짝 움직이기 시작해서 점점 더 큰 동작으로 여섯 번 정도 흔들고 일어난다. 좌선을 시작할 때와는 반대이다. 천천히 일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용히 걸어보자. 행선은 좌선의 걷기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행선할 때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넣고 주먹을 쥔 후 가슴에 올려놓고, 왼손바닥으로 잘 감싸서 양손이 직각이 되도록 잡아준다. 팔을 일직선으로 유지하면서 몸은 똑바로 세우고 눈은 발 앞의 2미터 지점을 지그시 바라본다. 이제 천천히 걸으면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센다. 왼발부터 내딛는다. 뒤꿈치부터 발가락까지 순서대로 바닥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걷는다. 침착하고 정숙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조용히 걷는다. 행선할 때에는 정신을 놓고 걸으면 안 된다. 숫자를 세는 데 집중하며 걷는다. 좌선을 20~30분 하고 나면 최소한 5분 이상 걷기명상을 한다.

걷기명상은 몸을 움직이는 좌선이다. 임제종과 조동종의(유명한 일본 선 전통의 두 종파) 행선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임제종의 걷기명상은 빠르고 역동적인 반면에 전통적인 조동종의 방법은 느리고 여유로운데, 매 호흡마다 15cm씩 앞으로 나간다. 나의 스승인 하라다 로시(Harada-roshi)는 이 두 방법 중간쯤의 걸음걸이를 선호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그 방법으로 수행하고 있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 임제종에서는 오른손 위에 왼손을 올려 놓고, 전통을 중시하는 조동종에서는 로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게 놓는다.

스승님은 임제종의 방법이 더 좋다고 생각하여 왼손을 위로 올려놓는 것을 적용했다. 걷는 것이 경직된 다리를 풀어 주기는 하지만 이러한 점은 부수적인 것이지 행선의 주 목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호흡을 세는 수행을 하는 사람은 행선 동안에도 계속 호흡을 세면서 해야 하고, 화두를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은 행선을 하면서도 계속 화두에 집중해야 한다.

저자의 『선의 세 기둥(Three Pillars of Zen)』에서 발췌하여 Philip Kapleau가 편집, 출판사(Weatherhill, Inc.)의 허가를 받았다.

4. 존 카밧진 JON KABAT-ZINN (번역: 정진옥)

스트레스 해소 전문가(역자주-미국 메사추세츠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과학자이며 저술가, 명상 지도자이다. 마음챙김에 기반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MBSR)을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좌선에는 어려움을 느끼지만 걷기를 통하여 깊은 명상 수행을 한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항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더구나 어느 정도의 고통이 있거나 불안할 때나 분노에 차 있을 때 차분히 앉아 있기는 사실상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도 누구나 걸을 수는 있다.

전통적인 사찰에서는 좌선과 걷기명상을 번갈아 수행한다. 그 둘은 같은 수행이다. 중요한 것은 앉아있거나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이다.

걷기명상을 할 때는 걷기 자체에 주의를 기울인다.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발바닥 전체에 마음을 둘 수도 있고, 발을 들어 올리는 등의 움직임 또는 발을 내딛음 등의 걷기 동작의 일부에 마음을 둘 수도 있고, 아니면 전체적인 몸의 움직임에 마음을 둘 수도 있다. 호흡의 알아차림과 걷기의 알아차림을 결합시켜 수행하는 것도 괜찮다.

걷기명상을 할 때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는다. 보통 짧은 구간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거나 지금 있는 공간에서 원 모양을 그리며 반복해서 걸을 수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특별한 목적지 없이 걷는 것이 오히려 우리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같은 공간에 있게 되는데 목적지를 가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호흡과 더불어 이 걷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걷기명상은 느린 걸음부터 활기찬 걸음까지 어떤 속도에서도 할 수 있다. 몇 발자국을 어떻게 내딛느냐는 걷는 속도에 따라 달라지며 중요한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 얼마나 온전하게 그 순간에 머무는가 이다. 이것은 다른 명상법과 마찬가지로 발, 다리, 몸통, 걸음걸이 등의 감각을 매 순간 모든 걸음에서 온전하게 느끼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발걸음 관찰하기’라고 하겠지만 이것은 발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지켜보는 것이다.

좌선과 마찬가지로 걷기명상을 할 때 주의가 흐트러지거나 산만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어떤 인지, 생각, 느낌, 충동, 기억, 예측 등 이러한 것들은 좌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스려야 할 과제이다. 결국 걷기명상은 움직이는 고요함 또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마음챙김이다.

걷기명상을 할 때, 특히 느린 걸음으로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이 좋다. 거실, 들판, 숲 속의 빈터, 한적한 해변도 좋은 장소다. 슈퍼마켓에서 쇼핑 카트를 밀며 천천히 걷는 것도 좋다.

일상 생활에서 걷기명상은 어디에서든 가능하다. 한 공간에서 왔다 갔다 걷거나 원을 그리며 걷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으로 걷는다. 거리를 걸으며, 직장의 복도에서, 등산을 하면서, 개를 산책 시키면서, 아이들과 걸으면서 마음을 챙기며 걷는다. 걷고 있는 이 순간에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지면에 발을 내딛을 때의 그 순간과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받아들인다. 만약 조급하거나 서두르는 기분이 들을 때는 걷는 속도를 살짝 늦추면 서두르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다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 올 수 있다. 내가 이 순간에 여기에 온전히 머물지 못한다면 내가 머물고 싶은 어떤 순간에도 머물기 어렵다는 것을 기억하자.

저자의 『Wherever You Go There You Are: Mindfulness Meditation in Everyday Life』에서 발췌, 출판사(Hyperion)의 허가를 받았다.

5. 틱낫한 스님 THICH NHAT HANH (번역: 원혜영)

자아실현의 길을 걷는 베트남 선승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보통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우리는 늘 서둘러야 한다. 그렇게 서둘러서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우리는 좀처럼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걷기명상을 하려면 산책을 한다. 공간이나 시간에 목적이나 방향을 두지 않는다. 걷기명상의 목적은 걷기명상 그 자체이다. 가는 것이 중요하지 도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걷기명상은 목적지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매 걸음이 삶이고, 매 걸음이 평화와 기쁨이다. 그래서 서두를 필요가 없으며 속도를 늦추는 이유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목표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기에 걷는 동안 미소 지을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걸음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이란 불안한 감정의 사슬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여유를 잃는다.

우리의 지구는 정말 아름답다. 지구 위의 길을 따라 수많은 우아한 자연경관이 펼쳐져 있다! 얼마나 많은 흙 길이 있는지, 어떤 길은 대나무가 줄지어 서 있거나 어떤 길은 향긋한 논을 휘감고 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숲길이 있는지, 어떤 길은 알록달록한 나뭇잎으로 뒤덮였거나 어떤 길은 시원한 그늘이 이어졌는지 아는가? 우리는 이 모든 길을 걸을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 걸림이 있고 발걸음이 편안하지 않는 한 즐길 수 없다.

걷기명상이란 편안하게 걷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 여러분이 태어나고 한 살쯤 되어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 걷기명상을 통해 걷는 법을 다시 배우고 나서 몇 주가 지나면 평화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이다.

수행하기에 좋은 길을 고르자. 강가, 공원, 옥상, 숲, 대나무 울타리가 쳐진 장소가 있으면 이상적이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교도소나 심지어 좁은 감방에서도 걷기명상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길이 너무 험하거나 가파르지 않으면 가장 좋다. 속도를 늦추고 발걸음에만 집중하자. 매 움직임에 집중하라. 품위 있게, 차분하게, 편안하게 앞으로 걸어가라. 발을 디딜 때 땅에 각인을 찍듯 의식하라. 부처님처럼 걸으라. 왕이 칙령에 옥쇄를 찍듯이 지구의 표면에 발을 딛자.

왕의 칙령은 백성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할 수 있다.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거나 백성의 삶을 망칠 수도 있다. 여러분의 발걸음도 그러하다. 발걸음이 평화롭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평화로운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면 두 번째도 할 수 있다. 백팔 번의 평화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부처님처럼 걸어볼 것을 권한다. 부처님이 걸으셨던 것처럼 걷자. 매 걸음마다 지구의 표면에 평화, 기쁨, 순수함의 각인을 남기면 지구는 곧 정토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아실현을 하도록 인도하는 데에는 설법이나 경전을 설명하는 것보다 오히려 당신이 걷는 법, 서 있는 법, 앉는 법, 사물을 보는 법으로 이룰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의 저서 『기쁨으로 가는 기나 긴 길: 걷기명상(The Long Road Turns to Joy: A Guide to Walking Meditation)』에서 발췌하였다.

6. 조안 할리팍스 Joan Halifax (번역: 박미선)

“지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듯이 걸으며(역자주-저자는 미국 선불교 법사, 인류학자, 생태학자, 시민운동가, 호스피스 간병인이다. 불교와 영성에 관한 여러 책을 저술했다.)

우리는 불자로서 개인, 사회 및 환경과 관련한 일에 조차 무원(無願, apranahita)을 실천한다. 이 말은 우리가 현재의 순간을 무너뜨릴 만큼 무언가를 의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시인 한샨은 자신의 그림자에게 묻는다. “여기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해?” 그냥 이 한 걸음, 길은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다. 우리는 길을 잃을 리가 없다.

언젠가 나는 캘리포니아의 오자이 협곡을 걸어가던 중 지구에 확실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멈춰서 살펴본 나의 발자국들은 규칙적이고 매끄러워서 흙에 새겨진 글씨 같았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금요일에 시내에 있는 사무실을 향해 서두르던 중에 문득 멈추어 서서 내 발자국을 돌아봤다. 지면에 또 다른 메시지가 있었다. 그 순간 우리가 내딛는 각각의 발걸음이 온전히 지구를 향한 소외나 관심의 메시지인지 알았다. 우리는 바로 걷기수행을 통해 이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일본의 선불교 수행에서는 걷는 것이 우리의 의식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길이다. 한 선승은 걷기를 바느질이 잘 된 승복에 비유했다. 한 땀 한 땀이 완벽하고 완전한 재봉으로 완성된 승복. 나는 이 승복에 대한 비유를 깊이 생각해보고 싶다. 마음챙김이 지향하는 정밀함과 조화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오래전 어느 날 나는 걷기명상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시애틀 근처 산후안 섬의 삼나무 숲길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과 함께 몇 시간 동안 숲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오늘 아침 정신없이 서두르느라 사라졌던 세상이, 느리고 조용하게 걸으니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가 천천히 걸으면 세상이 온전히 드러난다. 동물들은 더 이상 우리의 조급함이나 공격에 겁먹고 달아나지 않는다. 양치식물과 꽃의 아주 섬세한 부분이나 황폐화와 파괴도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의 안팎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바쁘게 간다. 감각이 고통이나 아름다움의 본체에 닿는 것을 두려워한다.

불자에게 걷기명상은 정신수양을 구체화하는 방법이다. 고요함 속에 앉아 몸을 멈추면 호흡, 마음, 신체가 평온해져 결국에는 하나가 된다. 이것은 명상적 안정, 균형, 비이원성과 비폭력의 중도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벽암록』 25칙에는 “고정된 위치만 고집한다면 독이 든 바다에 빠지게 된다.”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고정된 위치란 개념적 또는 물리적인 자리를 말한다. 그러나 걷기명상은 우리가 정신이나 균형을 잃지 않고 움직이도록 가르쳐 준다. 걸음을 뗄 때마다 우리의 인식을 지면에 닿게 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걷기명상은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분열을 메꾸어 주는 치료제와 같다.

지도는 세상에서 길을 찾는 데에 도움을 준다. 지도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 중에는 신화를 통해 발견된 지도도 있는데, 신성시 되던 장소가 인간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지도는 우리에게 지구를 가로지르는 길을 보여줄 수도 있다. 비행용, 운전용, 도보용 지도를 보면, 우리의 속도가 느릴수록 각 지도에 표시된 지형이 더욱 상세해진다.

리차드 베이커 로시는 우리가 알아차린 것만이 우리가 가진 세상의 전부라고 말했다. 이 말은 호주 원주민 남자의 일화를 상기시켜 준다. 그 남자는 친구와 차를 타고 가다가 그의 땅을 빠르게 지나치게 되자 노래를 빠른 속도로 불렀다고 한다. 노랫길(Songline, 구전 지도)은 걷는 속도에 맞춰 불러야 한다. 이렇게 걷기 속도나 지표면의 흔적을 보면 조상과 토템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미묘함과 신체에 존재하는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노래에 표현된다. 걷기를 통해 그 자리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친밀해질 수 있다.

7. 브루스 채트윈 BRUCE CHATWIN (번역: 시현스님)

방랑의 기원에 대하여(역자주-저자는 영국 출신의 여행작가, 소설가, 언론인이다.)

나는 내 인생의 "여행" 단계가 지나갈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정착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하기 전에 저 공책을 다시 펼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매료시켰던 아이디어, 인용구, 만남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적어 두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가진 수많은 궁금증 중 가장 궁금했던 인간의 방랑에 대한 본질을 밝혀주길 바랬다.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pensées)』에서 모든 불행은 한 가지 원인, 즉 방에 가만히 머물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물었다. 어째서 먹고 살 능력이 충분한 사람도 위험한 장거리 항해에 매료되는가? 다른 도시로 이주하려고? 후추 열매를 찾으려고? 그것도 아니면 전쟁에 나가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시간이 흘러 더 깊은 통찰을 통해 불행의 원인을 발견한 그는 그 이유를 잘 이해하고 싶었다. 곧 한 가지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았다. 바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함에 의한 원초적 불행이었다. 이는 너무 불행해서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엔 아무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낼 유일한 방법은 “죽음을 잊기 위해 딴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우리의 불행 중 최악이었다. 딴 생각에 파묻혀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어 서서히 파멸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혹시 산만함이나 신문물에 대한 욕구 같은 것은 철새가 터전을 옮기듯 본능적인 것일까?

모든 위대한 스승은 인류에 대해 “태양이 작렬하는 척박한 황야의 방랑자(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중 대심문관(The Grand Inquisitor) 챕터에 나오는 말이다)”이고, 인간성의 재발견을 위해 집착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고 말했다.

내가 최근에 쓴 두 권의 공책은 남아프리카에서 쓴 메모로 가득하다. 인류의 기원을 밝혀줄 증거물을 직접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었다. 그곳에서 내가 배운 사실과 오랫동안 세워온 가설을 (노랫길에 관해 알게 된 것을 포함하여) 확인하는 것 같았다. 즉 우리는 본래 뇌 세포부터 발가락까지 가시덤불과 사막 등 거친 땅을 걷도록 만들어졌다.

만약 이 가설이 맞는다면, 사막이 우리의 ‘고향’이라면, 우리의 본능이 사막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형성되었다면 왜 더 나은 환경이 싫증나는지, 왜 많은 소유물이 우리를 더 지치게 하는지, 왜 파스칼의 상상 속 남자가 감옥을 편안한 안식처로 삼았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저자의 『노랫길(The Songlines)』에서 발췌하였으며, 출판사(Penguin Books)의 허가를 받았다. (역자 주-Songline: ‘꿈꾸는 길’이라고도 하는 노랫길은 호주 원주민들의 애니미즘에서 등장하는 땅(또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이 길에서는 전통적인 노래, 이야기, 춤이 이어진다.)

8. 헨리 데이빗 소로 HENRY DAVID THOREAU (번역: 이영희)

한가로이 거닐기 - 산책에 대해(역자주-저자는 미국의 철학자·시인·수필가이다.)

내 평생 산책의 기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즉 걷기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걷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한가로이 거닐다(saunter/영어)’라는 말은 중세에 ‘성지(Sainte Terre/불어)에 간다는 빌미로 적선을 구걸하며 나라를 떠도는 한가한 사람’이라고 멋지게 번역된 데서 유래되었다. 이후 아이들이 ‘저기 성지 순례자가 간다(Sainte-Terrer)’ 라고 부르면서 영어의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Saunterer’가 되었다. 물론 그들은 핑계대로 결코 성지에는 가지 않은, 단지 게으름뱅이이거나 방랑자였다. 정말 성지에 간 사람들은 좋은 의미의 ‘한가로이 걷는 자’이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saunter’의 어원을 ‘땅이 없는’ 또는 ‘고향이 없는’이라는 뜻의 ‘sans terre’에서 찾는다. 좋은 의미로 ‘특정한 집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모든 곳이 집이다’라는 의미이다.

바로 이것이 성공적인 산책의 비밀이다. 항상 집에 앉아 있는 사람은 어쩌면 가장 위대한 방랑자일 수 있다. 좋은 의미의 ‘거니는 사람’은 구불거리는 강과도 같다. 구불거리는 강은 항상 면밀하게 바다로 가는 최단의 길을 찾는다. 나는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이라는 첫번째 설명을 더 좋아한다. 사실 그것이 가장 있을 법한 어원이다. 모든 산책은 십자군 전쟁에 나가는 마음가짐과 같다. 즉 우리 내면에 있는 ‘은둔자 피터(Peter the Hermit)’와 같이 열광적인 설교자가 진군해서 성지를 다시 탈환하라고 선동하는, 일종의 십자군의 열정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겁 많은 십자군이고, 심지어 오늘날에는 불굴의 끝없는 모험을 하지 않으려는 그저 ‘걷는 사람’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원정은 관광일 뿐이고 저녁에는 우리가 떠났던 다정하고 푸근한 난로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산책의 반은 우리의 걸음을 되짚는 일이다. 우리는 가장 짧은 산책이라도 나서야 한다.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는 불굴의 모험심을 가지고, 비통해 하는 우리의 왕국에는 방부 처리된 심장만 유물로 보내겠다는 비장한 마음을 갖고 길을 나서야 한다. 만약 당신이 부모형제, 처자식, 친구마저 버리고 떠날 준비가 됐다면, 만약 당신이 모든 빚을 갚았고 유언장도 써 두었고 모든 일을 처리했다면, 그리고 만약 당신이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이제 당신은 걸을 준비가 된 것이다.

1862년도 6월에 발행된 「월간 아틀란틱(The Atlantic Monthly)」에 실린 저자의 수필 『걷기(Walking』에서 발췌했다.

1984년 인도 라다크, 12일간의 걷기 중 강을 건너며 by Richard Long

9. 마쓰오 바쇼 Matsuo Basho (번역: 법현스님)

17세기 일본의 하이쿠 시인. 여행가의 삶에 관하여.

해와 달은 영원한 여행자이다. 흘러가는 세월 또한 나그네이다. 평생을 떠 있는 배 위에서 보내거나 지친 말을 몰며 늙어가는 이에게는 나날이 여행이며 여행 자체가 곧 집이 된다. 옛적부터 여행하다 길 위에서 생을 갈무리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나 역시 바람에 떠다니는 구름에 이끌려 방랑자의 삶을 꿈꾸어 왔다.

지난 가을 해안을 따라 걸었던 일 년간의 도보여행에서 돌아왔다. 새해에 맞추어 수미다 강가에 있는 내 작은 오두막의 거미줄들을 걷어 내었지만, 들판에 봄 안개가 피어 오르기 시작하자 나는 시라카와 관문을 넘어 북쪽 내륙을 여행하고 싶어졌다. 방랑신 도소진에 홀린 듯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면바지를 수선하고 대나무 삿갓 끈을 새로 달면서 여행을 떠날 날들을 꿈꾸었다. 다리에 쑥뜸을 떠 체력을 기르면서 마음속으로 마쓰시마 섬 위로 떠오르는 환한 달을 그렸다.

이윽고 음력 3월 27일 이른 새벽, 동틀 무렵 옅은 안개 속 달은 점점 희미해지고 후지산의 윤곽이 드러나는 그 시각에 나는 우에노와 야나카의 벚꽃 아래에서 드디어 여행을 시작했다. 지금 이 벚꽃들, 언제 다시 보게 될는지…… 오랜 벗들 여럿이 밤부터 모여 함께 배를 타고 멀리까지 배웅해 주었다. 센주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자, 앞으로 펼쳐질 삼천리 먼 여행길에 내 마음속으로 밀려오는 벅참을 느꼈다. 이 세상이야 그저 한낱 꿈일 뿐. 흘러내리는 작별의 눈물 속에서 세상의 덧없음을 새삼 느낀다.

봄은 가고
새는 우는데
물고기 눈에는 눈물

이 첫 시구를 읊으면서 나의 여행은 이제 시작되었다. 남겨진 이들은 떠나는 이의 뒷모습에 드리운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서 있다.

샴발라 출판사(Shambhala Publications) 재판 발행, 샘 해밀(Sam Hamill) 번역, 『내륙으로 가는 좁은 길(Narrow Road to the Interior)』에서 발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