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비구니 계맥(戒脈)의 흐름을 보다 – 글: 유정스님

유정(전국비구니회 교육국장)

계맥, 즉 ‘계법을 전(傳)하여 받은 계통(系統)’을 살피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인류는’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우리는’으로 고친다. 우리는 뭔가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이)가 이어온 혈통이나 전통이 알맞은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그(것이)가 적합한 것인지 혹은 타당함을 지녔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한 방편일 것이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수많은 질문을 만들어내고 사유하곤 한다.

 

지난해 말, 현대사에서 ‘최초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스리랑카 비구니 쿠수마스님이 입적했다. 그러자 세계 각국에서 온라인 비대면으로 참여한 비구·비구니와 재가불자들이 추모회를 갖는 역사적이고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국, 베트남, 스리랑카, 태국, 미국, 호주, 인도 티베트로 출가한 스님들을 비롯하여 독일 등 미처 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나라에서까지 120여 명이 온라인으로 연결된 추모회에 동시에 모여서 쿠수마스님의 위대한 업적을 알리고 추모하한 일은 비구니 계맥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다.

쿠수마스님이 받은 비구니계는 지난 천여년 동안 스리랑카에서 끊긴 비구니계맥을 잇는 일로, 우주를 오가는 초고속시대에 살고 있지만, 과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행으로만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일로서,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면면히 이어온 계맥이기에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불교의 흐름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졌고, 어떻게 이 시대를 이끌어 줄 수 있는지를 사유하게 하는 하나의 불교 역사적 지표라 할 수 있다.

인류사에서 비구니계의 시작은, 기원전 6세기경,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타미 마하빠자빠띠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한 후, 이어진 500여 명의 석가족 여인들의 출가로 비구니승가가 이뤄졌다. 그 후, 기원전 3세기경(혹은 1세기경) 아소카왕은 국제적으로 불교 전파에 큰 공을 세웠는데, 그 목적 중의 하나로 딸인 공주 상가미따 장로니와 다섯 명의 비구니들을 왕자 마힌다와 함께 스리랑카에 파견했다. 이때 상가미따는 부처님 깨달음의 성지인 부다가야에서 보리수 나뭇가지를 스리랑카에 이식하면서 스리랑카에 비구니승가를 형성했다.

『마하밤사, Mahāvamsa』 기록에 의하면, 그때 스리랑카 왕녀 아눌라와 여러 스리랑카 여성들이 비구니가 됐고 어린 소녀(童女)들은 사미니(沙彌尼)가 됐다. 마리짜왓띠 사원의 낙성식에 십만 명의 비구와 구만 명의 비구니가 참석했다. 이들은 뒤에 중국 비구니승가의 재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중앙아시아의 무역로를 따라 1세기경이다. 그리고 4세기경부터 불교가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그 후 중국으로부터 한국, 일본, 베트남으로 확산하였다.

중국의 비구니 행장(行狀)을 다룬 석보창(釋寶唱)의 「비구니전(比丘尼傳)」에 따르면, 처음 진(晉)나라의 정검니(淨撿尼)는 312년 비구 화상(和尙) 지산(智山)에 의지하여 사미니십계를 받고서 죽림사(竹林寺)를 세우고 24명과 같이 수행했다. 당시 율장의 문헌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검니와 다른 4명은 357년에 비구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중국의 첫 비구니들이 되었다.

그 후, 429년 카시미르 출신의 인도 승려 구나발마(Gunavarman, 求那跋摩)가 송(宋)나라에 오자, 중국의 비구니들은 자신들이 율장에 따라 제대로 계를 받은 것인지 물었다. 그리고, “대중처소에서 비구니가 2년 이상 배우지 않았으면 죄를 얻는다.”라는 답을 들었다. 이에 중국의 비구니들은 율장에서 제시하는 의식에 맞게 비구니승가를 이루고자 염원했다.

법에 맞는[如法] 수계를 위해서 중국 비구니승가 측에서 스리랑카(鐵薩羅, 싱할라)의 비구니들을 초청하였다. 처음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도착한 비구니가 10명이 되지 않자, 다시 시도하여 2차에 걸쳐 비구니 19명이 도착했다. 432년 그들로부터 식차마나계를 받고 2년간 육법을 공부한 후에 434년에 율장에서 정한 법에 따라 구족계를 받았다. 그때 중국에 비구가 많이 없었으므로 ‘변방의 예’를 따라 혜과와 정음 등이 초청한 승기발마가 거느린 (비구) 5인과 스리랑카 비구니 10명으로 구성된 이부승으로부터 혜과, 혜의(慧意), 혜징(慧鎧)을 비롯한 300명이 남림사(南林寺) 수계단에서 거듭 구족계를 받았다.

여기서 ‘변방의 예’라 한 것은, 부처님 당시 중앙 승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는 승가의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10인이 아닌 5인의 비구가 구족계를 줄 수 있는 예외법을 말한다. 그리고 ‘비구니가 2년 이상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구족계를 받기 전 식차마나계를 받고 2년간 육법을 지키면서 구족계를 배워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중국에 정식 절차를 밟은 여법한 비구니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인도의 비구니전통을 이은 스리랑카 비구니들을 초청하여 비구니법맥을 이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스리랑카 비구니들은 실론 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왔는데, 배가 풍랑을 만났으므로 한 번에 이뤄지지 않았다. 처음 실론 섬에서 스리랑카 비구니가 출발하여 마침내 수계식을 봉행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10여 년이 걸렸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까지 인도에 비구니승가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왜 굳이 해로를 이용해야 하는 스리랑카로부터 계를 이었는지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가장 먼저 전래된 곳은 고구려로 소수림왕 2년(372)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왕이 순도(順道) 화상을 통해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했고, 2년 뒤에 아도(阿道) 화상이 고구려로 와서 불교를 전파했다. 백제에는 침류왕 1년(384)에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오면서 불교를 전래하였다. 신라에는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 阿道)가 신라의 일선군(一善郡; 善山)에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佛法)을 전하였다. 모례의 동생 사씨*가 최초의 비구니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씨가 구족계를 수지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리고, 백제에는 겸익이 인도에서 많은 경전을 들여왔는데, 그 이후 일본에서 선신니(善信尼) 등이 와서 이부승에 의해 구족계를 받고 돌아가서,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비구니들의 활동도 무척 활발했고, 비구·비구니들이 엄격한 계율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이후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비구니의 활동이 역사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꾸준히 비구니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국 관련 여행기를 쓴 바델여사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보면, 조선 후기에도 금강산의 선방에서 비구니들이 공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이후에는 일제의 불교 탄압과 격변의 시대에 전혀 굴하지 않고 비구니들이 올곧게 수행하였으며 현대에는 세계에서 비구니 위상이 가장 높은 곳이 바로 한국불교라는 평도 받고 있다.

 

이렇게 이어온 비구니 계맥으로, 마침내 1997년 인도 사르나트에서 이부승에 의지하여 스리랑카 10인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니, 그 첫 번째로 받은 이가 바로 쿠수마 스님이었다.

쿠수마스님을 비롯한 10인의 스리랑카 비구니들은, 2년 뒤인 1998년 대만에서 있었던 세계비구니 수계식에서, 선배로서 습의사 역할을 했고, 보드가야 스리랑카 마하보디 사원에서 몇 년을 더 공부한 후에, 스리랑카로 돌아가 스리랑카 비구니 계맥을 이어왔다. 이렇게 이어진 스리랑카 비구니계단에서 비구니계를 받은 이들은 태국, 미얀마, 서양의 비구니들로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해 전체적으로 현재 5천여 명의 비구니가 탄생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렇게 천여 년을 돌아서 이제 다시 한 번 세계를 향한 발판이 된 스리랑카 비구니계맥의 그 기반을 다지게 한 것이 바로 한국 비구니승가이다.

 

한편, 지난해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온라인 사캬디타 대회에서 발표된 한 논문은 우리의 흥미를 끌어낸다. 인도인 하샤 과땀(Harsha Gautam)은 「장벽을 허물다, 과거와 현재: 비구니들의 국제적 협력의 발자취를 찾아서, Breaking Barriers, Then and Now: Tracing the Transnational Alliances of Bhikkhunis」에서, 5세기경 스리랑카 비구니들이 자신들이 속한 상좌부(Theravādin school)의 계 대신에 당시 중국에 유행했던 설일체유부파(Sarvāstivādin school)의 전통에 따른 계를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다른 나라와 부파에 속한 비구니들 간의 정중하며 강한 협력의 역사적 선례로 규정한다. 그러한 선례가 여러 나라의 비구니들 사이의 유대 강화를 위해 현대에 필요한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의견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5세기경이면 이미 중국에는 중요한 율장들이 거의 모두 번역이 된 상태이므로, 과땀의 견해처럼 중국이 상좌부 계통의 빠알리 율장에 의지하지 않고 설일체유부파의 『십송율』에 의지했다는 견해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수계 관련 계목들을 비교할 때 율장들의 내용이 아주 미세한 부분만 제외하고 거의 같다는 점에서, 전통을 내세울 때 어느 율장의 전통에 의지했냐는 것이 분쟁의 초점이 될 수는 없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빠알리 율장을 의지하는 스리랑카의 불교계에 『사분율』을 의지하는 한국의 비구니전통이 이어졌다는 것이 분쟁의 씨앗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여러 율장 중에서 빠알리 율장과 가장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율장이 바로 『사분율』이라는 점에서, 중국에서 스리랑카 비구니스님들이 이은 전통이 『십송율』에 의지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분율』에 의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현대에 한국이 스리랑카에 이은 비구니 계맥의 전통도 『사분율』에 의지하였지만, 받아들인 스리랑카 비구니스님들에게는 빠알리율의 전통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사씨의 한자 표기는 ‘삼국유사’에는 사씨(史訖), ‘해동고승전’에는 사시(史侍)로 표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