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리더십시리즈] 굿 거버넌스에 대한 불교의 기여 #2

글: 아잔 브람 스님
번역: 이영희(샤카디타 코리아 운영위원)

원문 출처: https://bswa.org/teaching/buddhist-contribution-good-governance-e-book-ajahn-brahm

굿 거버넌스에 대한 불교의 기여 #1 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2. 의사결정

의사결정은 지도자의 역할이다. 의사결정의 심리학에 있어서 불교의 기여는 지대하다. 부처님은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4가지 비도(非道 욕망, 분노, 어리석음, 두려움)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닌지 확실히 살펴야 한다고 하셨다.

2.1 욕망

불교에서 이상적인 리더(짝까와띠 담마라자: Cakkavatti dhammarājā)의 의무 중 하나는 관대함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 불교는, 자신이 좋아하는 예쁜 여자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해달라며 절에 가서 빌거나 사업이 번창하도록 기도해 달라며 자기 사무실에 스님을 모시고 와서 공양을 올린다. 또 어떤 경우는 사찰의 커다란 동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위해 건축 불사에 큰 돈을 보시한다. 이러한 일은 관대함이 아니라 거래이다. 돈을 보시한 대가로 광고할 권리를 갖거나 동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거래의 한 형태일 뿐이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보시여야 진정한 보시이다.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저녁에 초청 법문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한 폴란드 여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여성이 문득 “비용이 얼마예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그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제 말을 이해 못하셨군요. 제가 법회에 참석하려면 얼마를 내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부인, 돈을 내시지 않아도 됩니다. 무료입니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잘 들어보세요!”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달러요! 돈 말이에요! 법회에 참석하려면 얼마를 내야 하냐구요?” “부인, 정말로 돈을 내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저희는 당신의 이름을 적지도 않고, 당신에게 어떤 책자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법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나가셔도 됩니다. 정말 무료입니다.” 라고 설명했다. 긴 정적이 흐른 후, 그녀는 가장 진솔한 질문을 했다, “정말 무료라면, 그러면 당신네 스님들은 강연에서 무엇을 얻나요?” “행복입니다, 부인. 단지 행복뿐입니다.” 나는 대답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이상적인 협치, 즉 굿 거버넌스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리사욕이 아닌 자기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물질적 보상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이 이끌어야 한다. 지도자의 유일한 보상은 봉사하는 행복 속에 있다. 그 보상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예전에 말한 것을 반추하게 한다.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가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지도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2.2 분노

악의가 동기가 되어 내린 결정은 단지 더 큰 악의를 만들어낼 뿐이다. 『법구경』의 유명한 구절처럼, ‘이 세상에서 증오를 통해서는 증오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영감을 주는 지도자 넬슨 만델라는 26년 동안 부당하게 투옥되었다. 출소한 후 바로 그는 전권을 지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 전권으로 자신을 투옥시킨 사람들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복수 대신 그는 용서를 택했다. 만델라는 자신의 인종을 억압한 사람들에 대하여 악의를 갖지 않고 통치했다. 만델라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의 조국은 인종차별이라는 어둠에서 벗어나, 놀랄 정도로 폭력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투옥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악의없이 이끌었다. 그는 예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선한 대의를 위해 내 생명을 주어야 할 수 천 가지 이유는 알 수 있어도,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을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간디의 리더십 덕분에 당시 가장 강력한 제국 중 하나였던 영국을 그의 조국으로부터 몰아낼 수 있었다. 나는 또한 옐친 대통령 때문에 유명해진 러시아 속담 하나를 인용하고자 한다: “칼로 만들어진 왕좌에는 그 누구도 앉을 수 없다.”

이러한 일화들은 악의, 증오, 복수심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은 단지 그 통치자를 조롱 당하는 폭군으로 만들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모든 행보는 가로막히고, 그 지배는 불안정하게 된다.

악의에서 나온 결정은 더 많은 문제만 일으킬 뿐이다. 그리스신화에 머리를 많이 가진 히드라라는 괴물이 등장한다. 공격자가 히드라의 목을 하나 잘라내면, 잘린 곳에서 금세 두 개의 머리가 자란다. 악의에서 나온 결정은 마치 히드라의 머리를 자르는 것과 같아서 단지 문제를 키울 뿐이다.

2.3 어리석음

사람이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단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또 심리적으로 나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면, 잘못이 없는 것조차 모두 거부해 버리게 된다. 지도자가 사리사욕과 어리석음에 미혹되어 있다면, 상황을 오판하게 되고 협치를 해야 할 때 큰 실수를 범하기 쉽다.

지도자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사리사욕과 나쁜 마음을 벗어나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모아야 한다. 성급한 결정은 종종 잘못된 결정을 내리도록 만든다.

『무문자설경(無聞自說經)』에 나온 불교 우화의 하나는 좋은 협치를 위한 전형을 보여준다. 코끼리와 일곱 명의 시각장애인의 이야기가 이것이다.

옛날옛적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은 신하들로 인해서 골치가 아팠다. 신하들이 어찌나 논쟁을 많이 하는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신하들은 가장 오래된 정치 전통을 따르고 있었는데, 각자 그들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모가 풍부한 왕이 특별한 대중 축제를 열자, 신하들 모두 하루 동안은 싸움을 중단하고 쉬기로 했다.

축제는 큰 경기장에서 열렸는데 볼거리가 매우 많았다. 노래와 춤, 곡예사, 광대, 음악, 그 밖의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런 다음, 많은 군중들 앞에서 마무리 행사로, 신하들이 행로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채, 왕 자신이 직접 경기장 가운데로 왕실의 코끼리를 몰고 나왔다. 도시 전체에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가 있다고 잘 알려진 일곱 명의 시각장애인들이 코끼리를 따라 들어왔다.

왕은 첫번째 시각장애인의 손을 잡아 그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볼 수 있도록 도운 후, 이것이 코끼리라고 말해주었다. 그런 다음 두번째 시각장애인이 코끼리의 엄니를 만져보도록 도왔고, 세번째 장애인에게는 코끼리의 귀를, 네번째 장애인에게는 머리를, 다섯 번째는 몸통을, 여섯 번째는 다리를, 일곱 번째는 꼬리를 만져보도록 했다. 물론 ‘이것이 코끼리이다’ 라고 각각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서, 왕은 첫번째 장애인에게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는지 큰소리로 말하도록 했다.

“제가 숙고한 전문적 견해로는” 코끼리의 코를 만진 첫번째 시각장애인이 말했다. “최고의 확신을 가지고 말하건대, 코끼리는 파이톤 아시아티쿠스 속의 뱀의 일종입니다.” “무슨 헛소리야!” 코끼리의 엄니를 만진, 두번째 장애인이 외쳤다. “코끼리는 너무 단단해서 뱀일 수는 없어. 정말 사실, 나는 결코 틀려본 적이 없거든. 코끼리는 농부의 쟁기야.”

“웃기는 말이로군!” 귀를 만진, 세번째 장애인이 비웃었다. “코끼리는 야자나무 잎 모양의 부채야.”

“무능한 바보들” 머리를 만진, 네번째 장애인이 코웃음 쳤다. “코끼리는 분명히 커다란 물병이야.” “말도 안돼! 절대 아니야!” 코끼리의 몸통을 만진, 다섯 번째 장애인이 소리쳤다. “코끼리는 큰 바위야.” “가당치도 않아!” 다리를 만진, 여섯 번째 장애인이 외쳤다. “코끼리는 나무 둥치야.”

“멍청이가 많기도 하군!” 꼬리를 만진, 마지막 장애인이 비웃었다. “내가 코끼리가 정말로 무엇인지 알려주지. 코끼리는 파리채의 일종이야. 난 안다고, 내가 만져서 알아!” “헛소리, 뱀이라고.” “그럴 리 없어! 물 항아리라니까.” “코끼리는 절대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니야”

시각장애인들이 너무 열띠게 또 동시에 다투기 시작해서 말과 말이 뒤엉켜 난장판이 되었다. 욕설이 난무하며 주먹다짐이 오갔다. 시각장애인들은 누가 누구를 때리는지 확실히 몰랐지만, 싸움의 분노 속에서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원칙을 위해, 진실을 위해, 사실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기 자신의 진실일 뿐이었다.

왕의 군사들이 눈도 안보이고 멍든 싸움꾼들을 떼어놓는 동안, 경기장에 있던 군중들은 조용히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신하들을 조롱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 각자는 진실을 이루고 있는 전체의 한 부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제한된 지식을 절대 진리로 고수한다면, 우리는 코끼리의 한 부분만 만졌으면서도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고, 자신의 부분적 경험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시각장애인들과 같다. 이와 같은 맹목적 믿음 대신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다. 일곱 명의 장애인들이 서로의 데이터를 반대하는 대신 자신들의 경험을 합했더라면 결과가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그들은 아마 이렇게 결론 내렸을 것이다. ‘코끼리는 네 개의 튼튼한 나무 둥치 위에 서있는 거대한 바위 같은 것이야. 그 바위의 뒤 쪽에는 파리채가 있고 앞에는 커다란 물 항아리가 있지. 그 물 항아리 옆에는 야자수 잎 같은 부채가 있고, 아래쪽으로 두 개의 쟁기와 가운데는 긴 뱀이 있어!’ 이것은 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는, 그리 나쁜 묘사는 아닐 것이다.

2.4 두려움

많은 비효율적인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에 불구가 된다. 나는 많은 정부 관료들, 수상, 심지어 기업체 회장들에게 절대 미디어가 당신의 행복을 좌우하게 놔두지 말라고 조언해왔다. 많은 정부가 자유로운 언론에 의해 제약을 당할 수 있다! 소심함은 좋은 협치가 아니다.

수 년 전 태국에서 승려로서 두타행을 하며 행각할 때의 일이다. 북동부의 숲 속에서 밤새 명상을 하며 앉아 있었다. 당시 그 숲에는 직접 마주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호랑이와 코끼리들이 있었고, 나 또한 그들의 존재를 잘 감지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정글의 덤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고요하던 마음이 잠시 술렁거렸다. 내가 다시 차분하게 마음을 모으자 그 소리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작은 동물의 소리라는 판단이 재빠르게 들었기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또 명상 상태가 흐트러졌다. 다시 주의를 기울이자, 내가 조금 전에 잘못 생각했음을 곧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작은 동물이 아니라 중간 크기의 동물이며 내가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호흡에 집중했지만 걱정이 좀 되었다. 그 동물이 내 자리까지 가까이 오자, 나의 마음챙김은 공포심으로 아주 예민해졌다. 골똘히 잘 들어보니, 분명히 작은 동물은 아니었고 심지어 중간 크기도 아닌, 소리로 판단하건대, 큰 동물이었다. 어쩌면 호랑이, 그것이 곧장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공포심으로 눈을 뜨고, 내 앞 바로 몇 발자국 떨어져 스님을 잡아먹으려는 호랑이를 보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작은 생쥐 한 마리였다.

두려움이 숲 속의 쥐가 내는 작은 소리를 호랑이의 소리로 증폭시켜 놓았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포가 하는 일이다. 공포는 사실을 왜곡시켜 진실과는 완전히 다른 뭔가로 바꿔버린다. 우리는 두려움의 상태에서 뭔가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3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