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독소 빼기: 탐진치 삼독을 정화하는 다섯 가지 수행법

[세계불교정보]
저자: Melvin Escobar, Melvin Mcleod, Narayan Helen Liebenson, Sister True Dedication, Koun Franz, Judy Lief
번역 및 요약: 샤코 통역정진팀(선우스님, 김유미, 김한울, 정형은)

원문 게재일자: April 28, 2022
출처: Lion’s Roar Detox Your Mind: 5 Practices to Purify the 3 Poisons

다섯 명의 불교 스승이 말하는 삼독을 정화하는 수행법에 대해 알아보자. 삼독은 고통을 일으키고 깨달음의 길을 방해한다. 먼저 Lion’s Roar의 편집장인 멜빈 맥리오드의 삼독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Photo by Tim Gainey / Alamy Stock Photo

불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특징, 즉 불교를 불교답게 하는 것은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사성제의 집제(集諦)이다.

사성제의 나머지 고제(苦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살펴보면 (이생에 못 다하면 후생에서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지혜와 자비심을 가지고 윤리적인 삶을 산다면 고통을 경감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왜 괴로움을 겪어야할까? 불교만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불교는 이 질문에 대해 현실세계에 대한 간단하며 검증이 가능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는 설명을 제공한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무지, 즉 현실을 바라보는 잘못된 관점에 있다고 본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가르치셨다. 바꿔 말하면 모든 것은 죽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영혼, 인격, 자아, 즉 그저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 또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존재하지 않는 ‘나’의 노예이다. 우리의 자아를 보존하고 지키고 기쁘게 하는 일은 삼독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자아를 만족시키고 싶어하는데, 이를 집착, 열정, 욕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아가 싫어하는 것을 기피하게 되는데, 이를 혐오, 공격, 분노라고 부른다. 또한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도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이를 무관심 또는 무지(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인 무지와는 다른 의미)라고 부른다.

삼독은 세 가지 동물로 비유되기도 한다. 수탉은 무언가를 원한다는 애착의 의미, 뱀은 무언가를 싫어한다는 분노의 의미, 돼지는 나에게 끼치는 영향이 없으니 무관심하다는 의미의 상징이다. 삼독은 또한 세상을 내가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으로 나누는데, 흔히 여덟 가지 세상살이라고 부르는 행복과 불행, 명예와 치욕, 칭찬과 비난, 얻음과 잃음이라는 네 쌍의 단어로 표현된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는 모든 것을 이런 식의 이분법으로 나누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살이를 이르는 단어의 조합은 끝이 없다.

물론 우리가 고통을 추구한다거나 행복과 쾌락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삼독, 그리고 삼독이 만들어낸 고통에 끌려 다닌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 마음의 자아와 삼독으로부터 독소를 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내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는 한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 사람의 고통을 내가 기꺼이 짊어지는 대신 내가 가진 모든 행복을 주는 바로 그 순간이 진정한 무아의 순간이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사랑과 지혜를 느끼는 동시에 삼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내가 되고 싶었던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진정한 내 자신이 누구인지 느낄 수 있다. 바로 이것이다.

- 맬빈 맥리오드

1. 마음챙김

"나라얀 헬렌 리벤슨은 삼독을 '마음의 고통'이라고 한다. 마음챙김은 이 괴로움을 편안하게 해준다."

탐진치 삼독심을 빨리어로 번뇌(kilesa)라고 한다. 여기서 번뇌를 독, 괴로움, 허물, 번뇌, 고통 등으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나는 마음의 고통이라는 말로 번역하겠다.

삼독심은 연결감과 편안함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우리를 괴롭히고 분리감과 고립 패턴을 강화시킨다. 우리는 진지하게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삼독심은 내적, 외적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내적 자유를 빼앗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독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렇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방으로의 길이다.

우리는 "나는 화를 잘 내고 탐욕적이고 미혹에 빠진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자신과 삼독심을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 삼독심은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마주하고 해소해야할 자연스러운 성품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심, 증오심, 망상을 바라보면 용기가 생겨서 고통스런 감정을 대할 때 친절하고 자비롭고 지혜롭게 마주할 수 있다.

수행을 통해 욕심내고 화내고 미혹에 빠지기 쉬운 습관이 계속해서 강화되지 않도록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 더 나아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탐욕심을 없애겠다는 욕심으로 그것을 대한다면 오히려 더 커지게 된다. 증오심을 증오심으로 대하면 증오심만 더욱 키우는 꼴이다.

탐욕심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바라는 것이고 증오심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없애려 하는 것이다. 둘 다 무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딜레마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길을 보여준다. 친절과 자비와 지혜를 수행해서 번뇌가 해소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삼독심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있지만 개인의 문제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2. 사랑

멜빈 에코바는 마음수행이 탐진치를 치유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한다.”

탐진치 중에서 갈망하는 마음은 모자람이라는 착각에 근거하고 있다. 치유 방법은 베푸는 것이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내가 소유한 것을 남과 나눔으로써 필요 이상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어 결국에는 탐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해소된다.

탐진치 중 두 번째인 증오 혹은 분노는 이분법, 즉 너와 내가 다르다는 생각에 근간을 둔다. 자비심을 발휘하여 나와 ‘적’이 하나임을 이해하고 적대감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으면 증오가 해소된다. 제임스 볼드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증오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이유는 그 증오 자체가 사라진 다음에는 고통과 씨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증오는 ‘나’라는 개인이 존재한다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아픔을 내 것으로 흡수하고 치유의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통렌(tonglen) 수행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지의 인과는 집단적‧개인적 트라우마에 있다. 최근 몇 년간 인종 차별 문제에 더해 판데믹으로 인한 가중된 트라우마로 고통 받고 있는 시대이다. 그러나 트라우마의 또 다른 원인은 ‘나’ 자신에 있다는 자아비판적인 착각에 사로잡혀 문제를 더 크게 만들게 된다.

통렌 수행은 나와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무지를 중화하는 역할을 한다. 호흡을 들이쉬면서 타인의 아픔을 흡수하고 날숨에 치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수행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착각은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인과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탐진치의 극복은 베품, 자비 그리고 통렌의 마음 수행으로 매순간 호흡으로 이겨낼 수 있다.

 

3. 내려놓기

삼독과 고통의 실질적 원인은 무엇이든 놓치지 않으려는 집착이다. 코운 프란츠씨는 내려놓기는 자유로워지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싯다르타가 왕궁을 떠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불교의 핵심은 출가수행이었다. 우리는 부처님이 마치 해탈을 위해 모든 걸 다 버린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부처님은 그의 삶의 한 쪽을 틀어서 삶의 다른 한 면, 즉 육체를 초월한 비전으로 에워싸인 득도를 붙들었다. 결국 부처님은 그것마저도 다 내려 놓으셨다. 우리도 부처님 같이 될 수 있다.

삼독, 즉 집착, 혐오, 무지가 모두 집착과 붙들음에 기인한다. 집착의 경우는 너무 확연하다. 돈이든 신분이든 우리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든, 내려놓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이것은 좋고 나쁜 것의 문제가 아니다. 혐오 역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싫어한다. 이는 바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있기를 바라는 집착이기 때문이다. 무지는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실재 또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될 수 없는지에 대한 축약이 요구된다. 이것은 어떤 이야기의 전반부의 마무리이다.

그렇다면 불도의 시작과 이후 모든 단계에 있는 질문은 간단히 말해 당신이 꽉 움켜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내려놓기 힘든 무언인가에 대한 것이다. 당신이 무어라 말하든, 그 답이 바로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를 드러낸다. 당신이 지하실에 쌓아놓은, 풀지도 않은 상자를 내다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당신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못 바꾸는지에 대한 것일까? 아마도 이것은 아이가 안정감을 얻기 위해 껴안는 자신의 담요 같은 믿음장치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 자체일수도 있다.

이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니다. 뭔가에 집착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내려놓기 힘든 것, 바로 이것이다. 지금 집착하는 어떤 것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희망, 두려움, 믿음, 당신을 당신답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것마저도….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당신은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집착, 혐오, 무지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에게 모두 필요한 것이 아닌 데에도 없으면 안 된다고 착각한다.

싯다르타와 같이 우리 모두 왕궁에서 살고 있다. 바로 마음이라는 왕궁이다. 마음이라는 왕궁은 영원히 떠돌아다녀도 될 만큼 널찍하다. 우리는 거기에서 자아를 찾는 탐험도 하고, 마음에 드는 방에는 여러 번 다시 가보기도 한다. 아주 사소한 것조차 아주 중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곳을 떠나야만 할까? 그것은 바로 이 왕궁이 결국 벽으로 에워싸인 곳이기 때문이다. 궁궐의 벽너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정말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물건이나 견해, 신분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있다.

싯다르타는 떠나야만 했다. 우리도 싯다르타처럼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기를 너무 큰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한 번에 하나씩 내려놓기를 하면서 좀 수월해지면 하나 더, 하나 더 내려놓아 마침내 완전한 벌거숭이가 되어 빈손으로 성문을 넘어 세상 밖으로 발을 딛을 때까지 내려놓자. 내려놓기란 자유로워지기 위한 선택이다.

 

4. 지혜

공존(Interbeing: 상호의존)하는 존재의 본성 즉 이 모든 것은 상호의존해서 존재한다 은 삼독을 뿌리째 잘라낸다고 플럼빌리지의 엔기엠스님(Hiến Nghiêm)께서 말씀하셨다.

틱낫한 스님께서 만드신 공존을 뜻하는 영어단어 ‘Interbeing’은 모든 존재의 깊은 상호연결성, 즉 아무것도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오로지 다른 모든 존재들과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불교에서 “무아”나 “공”이라 말하는 것이 뜻하는 바는 이 세상에 영원하고 독립적이며 자생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기가 아닌 다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꽃이 아닌 요소(햇빛, 빗물, 씨앗, 흙 등등)로 인해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당신과 나 역시 우리가 아닌 것들로 만들어졌다.

삼독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탐욕, 분노, 무지 또한 수도 없이 많은 원인(인)과 조건(연)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각기 분리되어 자체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삼독을 공존의 관점에서 잘 들여다보면 삼독이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무엇이 지금 이 순간에 삼독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알아차림을 통해 삼독의 근원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화가 났다고 하자.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 분노를 공존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아마도 당신 주위의 집단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분노나 좌절감, 또는 당신이 보거나 읽거나 들은 것이 모여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삼독을 각각 분리된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삼독은 우리가 겪는 다른 고통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증오심은 두려움과 공존한다(반대쪽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증오하고 제거하려 한다). 또한 탐욕의 감정은 불안감과 공존한다(우리는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한다).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소비성향을 살펴보자. 요즘 시대에 아주 흔한 일이다. 마음챙김의 에너지는 이런 소비에 대처할 기회를 만들어주어 자유 의지와 힘을 되살려준다. 마음챙김을 통해 갈망을 부추긴 감정이 무엇인지 가늠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나는 도대체 무엇에 그렇게 굶주렸는가? 무엇에 그렇게 갈증 나는 것인가? 무엇을 회피하고자 하는 걸까?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갈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갈애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공존의 관점으로 보면 갈애의 원인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난다. 가끔 나 자신에게 묻는다. “고통을 감추려고 무언가를 탐하는 건 누구인가?” 이런 질문은 선문답과 유사하다. 나는 수행을 통해 내 식탐이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가다 갑자기 독한 술이 당기는 것(십 년 이상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도)은 어떻게든 고통을 잠재우고자 술을 찾던 할머니 쪽에서 나온 듯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소비는 고통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기에 이런 습에서 벗어나려나면 엄청난 힘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맞서기에 수월할 것이다.

나는 완전멈춤 수행(몸을 이완하기, 숨 고르기와 내려놓기)이 자유로워지는 길의 핵심임을 알게 됐다. 때로는 우리 안에 있는 조상님들과도 대화할 수 있다. 멈춤의 순간에 내가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할지를 깨닫게 된다. 쉽지는 않지만 내가 멈출 수 있을 때 변화도 주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게 되고 나를 위해서 또 친구들을 위해서 그리고 조상님들을 위해서, 참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알게 된다. 공존의 관점에서 아주 작은 행동 하나가 시공을 초월하여 전체 상황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5. 변성

파괴적임에도 불구하고 삼독의 본성은 지혜라고 주디 리에프씨는 이른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하게 되면 독이 약으로 변성되는 것이다.

모든 불교수행의 역할은 마음을 닦고 부정적인 감정의 요동을 평정시키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의 힘은 아주 세다. 우리를 쉽게 무너뜨리고 자기 자신이나 남을 해하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질문은,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해소하여 그로인한 해를 막거나 줄일 수 있는 가 이다.

전통적으로 수많은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탐(갈애: 원하는 것에 집착 하는 것), 진(공격성, 화, 증오: 원치 않는 것을 싫어하는 것), 치(무지: 회피하고 싶은 것을 못본척 하는 것) 삼독으로 귀결된다.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에너지는 집착과 싸움, 강한 주체와 개체 개념과 이원성이 두드러진다.

밀교에는 이렇게 급속도로 뻗쳐나가는, 잡초 같은 여러 부정적인 에너지를 다루는 수행법이 있다. 그 중 한 가지 방법은 잡초를 위에서 자르는 것인데, 잡초가 다시 자라날 때까지 한동안은 괜찮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라난다.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은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이다. 예로, 명상을 통해 깨어있음을 연마하고 마음의 속도를 줄이면, 부정적인 감정이 폭발하거나 우리를 엄습하기 전에, 일어나는 대로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변성의 밑바탕은 본성에 대한 자각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 안의 특정한 감정 패턴에 익숙해지면서 접근방식이 약간 덜 공격적이라도 된다. 자를 것인지, 뿌리째 뽑을 것인지 매번 고민하지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뭘 해야 할지를 알고, 매번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다. 부정적인 감정은 견고하지 않다. 어느 정도까지는 통제가 가능하며 꿰뚫어 볼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 그 자체는 우리가 충분히 다룰 수 있다.

밀교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여러 수행은 변성을 하기 위한 밑바탕이 된다, 변성은 마치 연금술과 같다. 독을 약으로 변화시키고, 혼돈을 지혜로 변화시킨다.

변성의 가장 밑바탕은 육도윤회와 열반, 고통과 깨달음 모두를 아우르는 본성에 대한 자각이다. 본성에 대한 자각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이것과 저것,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 현재에 머물러야한다.

변성은 극단적이지 않다. 감포파(Gampopa)의 법문집 중에 우리는 “그래서 혼돈이 지혜로 밝혀지기를”이라고 서원한다. 새벽의 여명처럼 점진적으로 자연스럽게 제대로 사물을 보는 눈이 밝아지게 한다.

변성수행에서는 의도적으로 특정 감정을 가라앉히기보다 오히려 더 부추기던지 강화시킨다. “나는 당신을 증오합니다” 또는 “나는 저것을 원한다” 등 감정은 보통 객체에 종속된다. 그렇지만 변성수행에서 감정을 나타내는 사람도, 감정의 대상도 없다. 그런 분열은 없고 단지 그 감정 자체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최대한으로 잘 드러내어 이의 본성인 순수한 지혜의 에너지가 서서히 밝아지게 만든다. 독이 약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