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그리고 인종, 성 정체성, 성차별

[생활 속에 실천되는 서양불교]
불교 그리고 인종, 성 정체성, 성차별
Buddhism and race, sexuality, and gender

저자: 젠주 마누엘(Zenju Earthlyn Manuel)
번역자: 민우스님

출전: Wisdom Publication: Buddhism and race, sexuality, and gender

내가 1988년 처음으로 일연종 모임에 참석할 때였다. 나는 배가 고파서 두 친구와 함께 식사를 먼저 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은 그 날 저녁 모임에 참석하기를 고집했다. 사람들이 남묘호렌게쿄를 외우는 동안 나는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짜증스럽게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달 뒤 나는 일본 글자가 쓰여진 족자가 걸린 불단 앞에서 기도를 할 만큼 불교에 빠져들었다. 스승들은 나에게 왜 기도를 하는지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말할 수 없는 깊은 아픔 때문에 기도를 한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이러한 아픔을 안고 기도를 한지 2년이 흘렀다. 나는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이 세상에 존재하는 더 큰 고통의 일부분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만의 고통이 아니었으며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하던 고통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나는 세계와 유리된 것처럼 느꼈으며 아무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주류 문화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은 외모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인종, 성별 그리고 계급이라는 구조가 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인식되며 어떤 대우를 받을지 결정했다. 이런 왜곡된 구조는 다른 사람들을 비롯한 나 자신조차도 나를 받아들일 수 없도록 영향력을 끼쳤다. 결국, 나는 소외감으로 무력감을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내안의 본질적인 지혜조차도 믿지 못했다. 어떤 인종은 다른 인종보다 못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판단을 내면화시키며 나는 내 자신을 배신한 것이다. 억압에 굴복했던 것이다. 억압이란 우리 본래 성품을 왜곡시킨다. 이는 우리를 세계와 서로에게서 갈라놓는다. 부드러움만이 억압이라는 왜곡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다. 이 부드러움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마음 속 깊은 곳의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부드러움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러한 부드러움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은 우리 본성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울음과 같다. 이는 우리를 지구와 또 서로와 다시 연결시켜 준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우리의 본성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과 우리 자신에게 고정된 인식을 강요하는 기성체제에 우리 자신을 끼워 맞추고 우리의 삶은 이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존재해온 고통에 내몰려 살아남기 위해 기성체제에 동조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고 또 자라난 환경에 익숙해질수록 본성은 우리에게 손짓한다. 이러한 손짓은 고통과 차별로 경험된다. 이 고통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잃어버렸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길을 선택해 걷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기 위한 탐색 과정을 사회 참여나 정신적 깨달음 또는 둘 다로 확대해 나간다. 온전함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나의 탐색은 사회 참여뿐만 아니라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내 경우에는 마치 불타는 문을 통과하듯이 인종과 성 차별과 관련된 고통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영적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중략)

대부분 사람들은 영적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깨달음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깨달음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선 좀더 분명히 알고 있다. 깨달음은 갈등, 불화, 고통 속에 자리잡지 못한다. 영적 깨달음은 고난, 아픔, 어려움과 같이 할 수 없다. 깨달음은 인종과 성별과 관련된 사회 문제 속에서 찾을 수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우리가 반대시위를 하도록 자극하는 분노, 노여움, 화 등은 우리를 뒤처지게 하고 삶의 깊이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하지만 차별이라는 환상이 빚어낸 인종주의나 성차별과 같은 문제들을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넓은 문을 통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과 같은 존재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평화의 성수를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깊은 통찰은 정작 우리가 보는 세상에 깃들여 있다. 영적 깨달음은 평범한 생활 속에 있으며 우리가 함께 치열하게 노력하는 가운데 있다. 우리가 피하고자 하는 두려움과 분노 속에서 솟아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인종주의, 성 정체성 그리고 성차별과 같은 문제들은 평화를 동경하는 우리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영성의 길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는 세계 곳곳의 많은 독자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자신의 피부색, 성별 그리고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학계를 비롯해 사회, 정치 활동가들, 영적 구도자들 모두를 염두에 두려고 애썼다.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에 관계의 단절이 긴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일깨우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인종, 성 정체성 그리고 성별과 투쟁하는 가운데 영원한 지혜를 향해 가는 그 곳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나는 다양한 세상에서 깨달음을 경험했고 이러한 깨달음은 모두 인종주의, 성차별 그리고 동성애를 혐오하는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점이다. 깨달음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거나, 아주 행복하거나, 텅 빈 그런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종, 성 정체성과 성별에 대해 영적인 주제로 접근하는 글이나 노래 영화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영적 깨달음을 경험하는 당처로써 체현되고 있는 인종, 성 정체성 그리고 성별을 한꺼번에 다루고 있는 문학은 충분치 않다. 우리가 처해 있는 바로 이 곳, 우리가 거느리고 있는 이 몸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깨달음이 마치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체현 밖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영적 문학에서 인종, 성 정체성 그리고 성별에 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영적 단체에서는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고 인종, 성 정체성 그리고 성별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 주제가 영적 단체의 논의 대상이 되더라도 긴장감이 돌게 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능력함으로 절망, 슬픔, 굴욕, 죄책감, 무감각, 공포 그리고 분노를 느끼게 된다. 화가 나더라도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서로 뜨겁고 애정 어린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이러한 긴장이 바로 가장 성스러운 시간이다. 이러한 성스러운 시간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공통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것이 공통기반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람들 간의 독특한 차이점을 없애버리고 더 많은 긴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단지 인간이라는 것 자체는 우리의 문제를 헤쳐 나가는데 충분한 공통기반이 될 수 없다. 신뢰를 우리의 공통기반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투쟁 속에 더 열려있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 길이 얼마나 험난하더라도 진실되게 이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END


*젠주 마누엘 스님은 캘리포니아 이스트 오클랜드(East Oakland, California)의 Still Breathing Zen Community를 이끌고 있다. 불교와 관련된 많은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