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없는 번영

[에코부디즘]
성장 없는 번영
Prosperity without Growth

저자: 팀 잭슨(Tim Jackson)
번역자: 이영희

출전: EcoBuddhism: Prosperity without Growth


Kandinsky: Composition-X

지속가능한 경제로의 이동
성장은 기껏해야 성장의 혜택을 불공평하게 분배해 왔을 뿐이다. 세계 인구의 오분의 일이 세계 수입의 단지 2%를 벌고 있다. 불평등은 20년 전보다 OECD국가에서 더 심하게 나타난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반면, 서구 중산층의 수입은 경기후퇴 훨씬 전부터 정체상태이다. 성장의 혜택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기는커녕, 성장은 오히려 많은 세계 인구를 실망시키고 있다. 부는 단지 운이 좋은 소수에게만 이어지고 있다.

공정함(아니면 공정함의 부족)은 부를 성취하는 전통적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몇 가지 근거 중 하나이다. 경제가 확대됨에 따라 경제와 연관된 자원 연결성도 확대된다. 이러한 영향은 이미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난 25년 동안 세계의 경제는 2배가 되었는데 지구 생태계의 약 60%는 더 악화되고 있고 전 세계 탄소 배출도 1990년 교토 의정서 이래 40%가 증가했다.

기름과 같은 주요 자원의 엄청난 부족은 10년 안에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낸다. 모든 것이 평소대로 굴러가는 세계는 이제는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9억 명의 사람들이 OECD국가에서 달성한 정도의 풍부함을 모두 열망하는 세계는 어떠한가? 그 정도의 경제는 2050년까지 지금 경제규모의 15배 여야하고 21세기 말에는 40배여야 한다. 그 정도의 경제는 어때 보이는가? 그 경제는 무엇으로 운영될 것인가? 그것이 정말 번영이 지속적이고 공유될 것이라는데 대한 믿을만한 비전을 제시할까? 이러한 의문들이 바로 본 논문을 재촉하여 쓰게 만들었다. 그 질문들은 진보의 의미에 대한 신중한 숙고의 오랜 전통 속에 있으나 또한 현실의 즉각적 우려를 반영하기도 한다. 기후변화, 연료 안보, 붕괴되는 종의 다양성, 전 세계적인 불평등은 지난 10년 동안 국제 정치 의제의 전면으로 거침없이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이슈는 더 이상 다음 세대나 다음 선거 주기까지 밀쳐놓을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번영과 성장사이의 관계에 대해 중요한 검사를 실시해 보고자 한다. 시작에서 본문은 더 가난한 나라들은 경제 발전의 긴급한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또한 이미 부유한 사람들에게 계속 오르는 수입이 생태적 한계로 제약 받는 세상에서 적절한 정책목표인지 아닌지 묻고자 한다. 논문의 목표는 실재하는 경제 위기를 작게 보이게 할 우려가 있는 부상하는 생태위기의 역학을 분석하고자 함이 아니고 지속가능한 경제로의 전환을 쉽게 해 줄 수 있는 일관된 정책 제안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본문은 선진국에서 계속되는 경제 확장이라는 가정에 도전하고 질문하고자 한다. 성장없이 번영을 달성하는 것이 가능한가?

무책임의 시대
경기후퇴가 이 질문을 극명하게 부각시켰다. 2008년의 금융 위기는 세상을 금융재앙의 끝으로 내몰았고 지배적인 경제모델을 뿌리까지 뒤흔들었다. 금융위기는 시장과 국가의 경계를 재정립했고 우리가 금융의 지속가능성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했다. 생태계 지속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성장에 대해 질문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었을 수 있다. 아니다. 반대로 이 위기는 심각한 반성을 할 가능성을 제공하고 금융과 생태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다룰 수 있게 한 특별한 기회이다. 그리고 본문이 주장하는 것처럼 금융과 생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현재의 혼란은 고립된 나쁜 관행의 결과이거나 단순한 감시의 실패가 아니다. 시장은 악당 개인이나 무능한 규제기관의 눈 먼 행위로 실행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은 오직 성장에 의해서만 멈출 수 있다. 성장 명령은 현대 경제라는 건축물을 만들었다. 시장은 금융 분야에 승인된 자유를 활성화하고 적어도 부분적으로 규제를 철폐하거나 불안정한 금융파생상품의 확산에 대해 책임이 있다. 계속적인 신용 확대는 소비성장을 자극하는 중요한 기제(mechanism)로서 고의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모델은 생태적으로 항상 불안정했고 이제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하다고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무책임의 시대는 우연한 실수나 개인의 탐욕 때문이 아니다. 만약 무책임이 있었다면 그것은 조직적이었고, 널리 인정되었고, 마음에 오직 계속적 경제 성장과 보호라는 한 생각만으로 자행된 것이다. 이 전략의 실패는 모든 면에서 재앙이었다. 전 세계에 걸친 파급력에서 뿐 아니라, 특히 가난한 나라에게 더 치명적이었다. 성장이 우리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현 상황을 복원하고자 하는 대응들은 단기적으로는 성공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를 금융, 생태적으로 지속가능성 없는 상태로 되돌려 놓을 뿐이다.

번영의 재정의
더 적절한 반응은 계속적인 성장위에 세워진 번영의 근본적인 비전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여전히 번영하나 환경에 대해서는 물질적 충격을 줄이는 대안적 비전을 찾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안녕(well being)에 대한 많은 자료들은 통찰력이 넘친다. 번영은 부인할 수 없는 물질적 차원을 갖고 있다. 불충분한 음식과 잠자리가 있는 곳에서 일들이 잘 진행된다고 말하는 것은 삐뚤어진 것이다(개발국의 수 억 명의 사람들에 대해서와 같은 경우이다). 당신이 몇 달이나 음식이 없고 수확을 다시 망쳤을 때, 어떤 음식이라도 축복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식 냉장고가 이미 엄청난 음식 종류로 꽉 차 있을 때 심지어 작은 양의 여분도 짐으로 여겨진다. 특히 당신이 먹으려 한다면 말이다.

더 강력한 발견은 번영의 필수품이 물질적 지지력를 훨씬 넘어 선다는 것이다. 번영은 중요한 사회적, 심리적 차원이기도 하다. 잘 해나간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사랑을 주고받고, 동료들의 존경을 누리고, 유용한 일에 기여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신뢰와 소속감을 느끼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번영의 주요한 요소는 사회적 삶에 의미있게 참여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번영에 대한 관점은 ‘융성적 능력(capabilities for flourishing)’으로, 아마티야 센(Amartya Sen)의 발전의 비전과 비슷한 점을 많이 공유한다. 그러나 이 발전의 비전을 이해할 때에 주의해야 한다. 현실에서 유리된 자유가 아니고 분명히 제한된 한계 내에서 잘 살겠다는 구속적 능력의 범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정하고 지속적인 번영이 이러한 물질적 조건들과 유리될 수는 없다. 융성적 능력은 한 손에는 세계 인구 문제로, 다른 한 손에는 지구의 유한한 생태 문제로 속박되어야 한다. 번영에서 이러한 자연적 구속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후손과 다른 생명체에게 헐벗은 지구를 선고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반대로 인간이 번영하고 동시에 덜 소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중요한 것이다. 이 일이 쉽게 달성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가볍게 포기해서는 안되고 이것만이 지속적 번영을 위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전망이다.

성장의 딜레마
이 비전을 손에 갖고 있다는 것이 성장 없는 번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번영과는 형식적으로 구별된다고 할지라도 계속적인 경제 성장이 지속적인 번영에 있어 필수조건이라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성장이 없다면 번영하려는 우리의 능력이 실질적으로 감소할 가능성은 여전하다. 경제성장을 방어하는 세 가지 연관된 제안이 있다. 첫째, 물질적 풍요는 결국 번영에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둘째, 경제 성장은 번영에 필수적인 몇몇 기본 권리 –즉 건강과 교육- 와 밀접히 관련되어있다. 셋째, 성장은 경제와 사회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제안 각각을 지지하는 증거가 있다. 물질적 소유는 우리가 사회생활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삶에서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한다. 경제성장과 중요한 인간 발달 지표 사이에는 통계적 연관성이 있다. 일과 생계를 보호하고 외부의 충격에 직면해서 붕괴를 피할 수 있는 능력, 즉 경제 회복력은 정말로 중요하다. 기본적 재능이 경제가 붕괴될 때 위협받을 수 있다.

성장은 지금까지도 붕괴를 예방하기 위한 회피 메카니즘이었다. 특히 시장경제는 노동생산성에 큰 강조점을 두고 있다. 기술의 계속적 개선은 주어진 노동 투입에 대해 더 많은 산출이 발생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요하게도 이것은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는데 점점 더 적은 사람들이 해마다 필요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가 노동 생산성을 상쇄할 정도로 빠르게 확장되는 한 문제는 없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고용에 하향 압력이 있을 것이고 사람들은 직장을 잃게 된다.

경제에 더 적은 돈이 투자되면 산출은 하락하고, 공공지출은 삭감되고, 공공부채를 서비스해주는 능력은 감소된다. 경기후퇴의 소용돌이가 서서히 드러난다. 성장은 단지 붕괴를 예방하는 이런 시스템 안에서만 필요하다. 이 증거가 우리를 불편하고 깊게 자리한 딜레마로 이끌어 간다. 성장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성장’은 불안정하게 보인다. 처음에 이것은 지속적인 성장에 대한 불가능한 정리(theorem)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연관성을 무시한다고 그것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성장의 딜레마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직면한 지속가능성에 대한 유일하고도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소비주의라는 철옹성(Iron Cage)
증거에도 불구하고, 심해자원과 탄소 배출 삭감이 시장경제 구조와 자연에 대립되지 않고 달성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공상일 뿐이다. 함께 성장 동력을 주도하는 현대 경제생활의 두 가지 연관된 특징이 있다. 신제품의 생산과 소비라는 것이다. 이윤을 원하는 생산자들은 더 새롭고, 더 좋고, 더 저렴한 물품과 서비스에 대해 계속적 추구를 하도록 자극받는다.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에 따르면 이 ‘창의적 파괴’ 과정이 경제 성장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개인회사에 있어, 더 저렴한 제품이 아니라 더 새롭고 흥미로운 제품을 디자인하고 생산하고 적용하고 혁신하며 마케팅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 같은 과정에서 실패하는 회사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가정의 신제품의 소비에 대한 시장이 없다면 새로운 것을 계속 생산하는 것은 회사에 거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 수요의 존재를 인식하고 성격을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물건이나 제품이 우리 생활에서 하는 역할은 그것과 밀접히 연관된 상징성이다. 즉 ‘제품의 언어’가 우리에게 서로의 사회적 지위, 정체성, 사회적 소속에 대해 대화하도록 해 준다. 예를 들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 서로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게 해준다. 신제품은 다양한 이유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신제품은 항상 신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수반하며 또한 자신과 가족, 좋은 인생이라는 꿈에 대한 열망을 탐험하게 해준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의 가장 강력한 점은 회사에 의한 신제품의 계속적 생산과 가정에서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완벽하게 부합된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끊임없는 욕구는 회사의 끊임없는 혁신에 대한 완벽한 보완제이다. 바로 이 두 가지 자기강화적 과정이 함께 합쳐진 것이 경제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합치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수그러들지 않는 신제품에 대한 추구는 사회의 안녕을 위협하는 불안을 만든다. 개인은 사회적 비교의 대상이 되고 회사는 혁신하거나 사장되어야 한다. 기관은 물질적 소비주의의 추구에 대해 편향되어 있다. 경제 자체는 생존을 위해 소비성장에 의존한다. 이러한 ‘소비주의 철옹성‘은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시스템이다. 불안하며 극도로 병적인 시스템이다. 그러나 한 면에서 이것은 효과가 있다. 환금성이 보장되고 소비가 증가하는 한, 이 시스템은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정체된다면 시스템은 붕괴한다.

케인즈 경제 학설과 녹색 제안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정책은 이견이 거의 없는 만장일치적인 면이 있다. 즉 회복이란 경제성장을 시동 걸기 위해, 소비지출을 활성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견의 차이는 주로 이것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로 제한된다. 이 지배적인 케인즈식 대응은 소비요구를 자극하기 위해 공공 소비와 세금감면을 혼용하자는 것이다. 매우 단순한 아이디어에 집중되는 국제적 합의를 주목해 보자. 경제회복은 투자를 요구한다. 이때 투자를 신중히 에너지 안보와 저탄소 공공 기반 시설, 생태보호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면 다양한 혜택이 있을 것이다. 혜택들은 다음과 같다.
▪ 에너지와 재료단가를 낮춤으로써 가정 소비와 생산 투자에 대한 자원을 보존할 수 있다
▪ 수입의존도를 줄이고 에너지 공급의 취약한 지정학에 대한 노출을 줄일 수 있다
▪ 확대하는 ‘환경 산업’ 분야에 필요한 대량 고용을 제공할 수 있다
▪ 어려운 세계 탄소 제한 목표를 향해 진보를 이룰 수 있다
▪ 귀중한 생태 자원을 보호하고 미래세대를 위해 현재 환경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녹색 자극’은 경제 위기에 대한 탁월한 분별있는 대응이다. 단기적으로는 경제회복, 중기적으로는 에너지 안보와 기술혁신, 장기적으로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지속가능한 미래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녹색적인’ 케인즈식 자극의 불이행은 경제를 계속적인 소비 성장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 상태는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른 형태의 거시경제 구조가 생태적으로 제한적인 세계에 필수적인 것이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