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에코부디즘]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What would the Buddha do?

저자: 데이비드 로이(David R. Roy)
번역자: 이영희

출전: EcoBuddhism: What would the Buddha do?


Shakyamuni Buddha, Jingo-ji, Kyoto, Japan

아마 현재의 모든 세대는 지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몇몇 위기상황에 대해 혼란스러울 것이고 또한 직면한 지구의 위기를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가장 최근의(2014) IPCC 보고서는 우리를 포함한 생태적 몰락이 단지 위협이 아니며 우리의 문명은 기후붕괴, 종의 대량 멸종, 자원고갈, 여러 유형의 공해, 아직 알지도 못하는 위기에 의해 매우 불편한 방식으로 변형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세계화하는 경제 시스템은 전체 생물권(Biosphere) 안에 속해 있지만, 그 시스템을 감시하는 CEO들은 다음 분기 보고서보다 더 멀리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대부분의 정치가들 역시 다음 선거 후의 미래는 생각을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요점 전달에 주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윤추구 기업인 주류 언론 매체들이 문제 해결 방법은 소비를 늘리고 GNP를 성장시키는 것이라는 정보오락(infotainment)과 확신으로 우리의 주의를 흩트리는 동안, 인구과잉과 엄청난 인구에 대한 기본필수품의 부족이 사회 붕괴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냉전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끝없는 전쟁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계속해서 적을 만들어 내야하는 거만한 군수산업체에게 끝없는 돈벌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선거자금에 대한 최근의 미국 대법원 결정은 더 많은 자금이 민주주의 과정을 왜곡시키도록 수문을 열어 주었다. 민주주의 체제가 붕괴되었으며 빈부의 격차는 계속해서 커지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 불자들도 이를 빠르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신이 이와 같은 위급한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거나 당신의 보는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지옥이 되어 가는데 자신은 좌복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무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전용의 지옥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수행은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더욱 광범위한 이해를 얻기 위해 좌복과 법당을 넘어서 확대되어야 한다. 마치 관세음보살처럼 우리는 세상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응답해야 한다.

때로 불교 수행은 ‘단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좋은 것이고 개념들은 나쁘다’라고 생각된다. 물론 우리가 즉각적인 감각과 정신 현상에 집중해야 할 시간과 장소가 있지만 그와 같은 명상만으론 충분치 않다. 만약 불교 수행이 우리에게 개념과 추상에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다면 우리는 사라지는 얼음과 영구동토층이 녹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 북극에 가봐야 하고, 뭄바이와 나이로비에서 가족들이 생존하기 위해 어떻게 사는지 보기 위해 그 곳 빈민가를 방문해야 하며, 중동에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이 진실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위해 이라크를 방문해야만 한다. 또한 그 밖의 여러 장소들도.

이와 같은 여행을 하기에 돈도 시간도 충분하지 않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쓰레기 매체나 정치와 기업의 짜깁기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인식수준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해 비판적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개념과 일반화는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은 아니다. 개념과 일반화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마치 희생자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그것들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음챙김을 자신과 인접한 주변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으로 알거나 우리의 인식에 그와 같은 제한을 두는 것은 또 다른 기본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가 속한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고립감,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Anatta)’는 자신의 관심과 다른 사람의 관심을 별개로 나누는 것은 기만적이라고 말한다. 카르마 법이 의미하듯 세상은 제로썸 게임이 아니다.

불교의 다른 두 가지 반응은 오로지 자신의 수행과 깨달음에만 집중하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기 전에 나 자신의 해탈을 이루어야 해”, “가장 높은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공한 것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운명이나 생물권의 운명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 두 가지 반응은 기껏해야 진실의 반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둘 다 좋지가 않다.

우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다루기 위해 우리 자신의 고통을 먼저 다 극복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속도를 내고 있고 당신과 내가 정각을 이룰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님이 그 곳 중간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지금 누구인가에 따라 그리고 수행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게다가 이런 반대는 영적인 수행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싸우기 전에 자신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더 넓은 세상의 고통을 다루는 것은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보살도를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법과 반대로 보살은 타인을 돕기 위해 자신의 완전한 깨달음을 미루지 않는다. 세상과 나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 속으로 나아가 깨어나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공하다. 과연 그럴까? 대답은 ‘yes'이기도 하고 ’no‘이기도 하다. 단지 ’공성‘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대승불교의 기본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반야심경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비록 색은 공할지라도 공은 즉 색이다. 우리 수행의 목적은 단지 고요하게 공성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모든 존재와 공유하고 있는 본질적 성질의 경이로운 활동을 폄하하는 것은 세상의 신비롭게 짜여진 삶의 복잡한 관계망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은 또 다른 현실이나 의식의 초월적인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세상과의 본질적인 불이를 깨닫는 것이며 또한 우리 자신의 공성을 깨닫는 것이고 그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가 없으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포함한 인간 활동을 충족시키는 가능성이 손상을 입는다. 건강한 생물권이 없다면 가능성은 파괴될 것이다.

부처님이라면 무엇을 하셨을까? 부처님이 여기 안 계시기에 그 대답은 모르는 것일까?

만약 부처님이 우리 안에 살고 계시지 않는다면 정말로 부처님은 죽은 것이다. 만약에 불자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불교는 죽은 것이다. 아니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 위급하고 피할 수 없는 난제는 가장 중요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우리의 현 상황에 적용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지구적 위기를 이해하거나 다루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더욱 나쁜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뛰어난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집단적인 위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고통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됐다고 느끼는 자아라는 망상 사이의 관계, 그와 같은 자아는 본질적으로 불편한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불안하고 자아를 안정화시키려는 모든 방법들이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개개의 자아에 대한 본질적 진실은 다른 집단의 희생을 대가로 자신의 집단의 사리를 촉진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려 하는 ‘집단적 자아’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생물권의 모든 존재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는 모든 종파주의, 성차별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군국주의가 왜 자기패배적인가 하는 핵심에 닿아있다. 분리가 문제라면 상호의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문제이든 핵심에 있는 것이다. 상호의존성은 단지 좌복을 위해서만 닦아져야 하는 통찰력이 아니다. 고통 받는 세상은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방식으로 상호의존을 깨닫도록 요구한다. 만약 불자가 이 일을 하길 원하지 않거나 이 일을 하는 방법을 찾아 내지 못한다면 불교는 오늘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영적인 길이 아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