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전생의 개념에 대하여 – 무아설과의 관련」

[웰다잉]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전생의 개념에 대하여 – 무아설과의 관련」
Dharma Data: Rebirth

번역자: 조은수

출전: Buddhanet: Dharma Data: Rebirth

불교에서는 어떤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나고 이런 죽고 사는 과정이 해탈을 얻을 때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중심에 영혼이라는 개념을 두고 이것이 진정한 인간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영혼이란 비물질적인 것이고 영원한 실체로서 사후에까지 존속하는 것이다. 반면 불교에서는 인간을 생각과 느낌과 신체와의 접촉감각으로 이루어 진 것이며 계속 변하고 움직이는 것으로 본다. 죽음이 왔을 때 이 정신적 에너지의 흐름은 새로운 몸을 얻어 정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영속적인 영혼’이라는 관념에 의지하지 않고도 개인의 연속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영속적인 영혼’이라는 것은 불교의 주요 교설인 ‘제행무상’의 보편적 진리성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관념이다.

한편 불교의 다양한 전통에서는 이 윤회의 과정에 대해 여러 다른 설명을 보이고 있다. 어떤 전통에서는 윤회가 바로 일어난다고 하는 반면, 어떤 곳에서는 49일이 걸린다고 한다. 어떤 전통에서는 중간단계, 즉 중음신(antarabhava)이 있다고 하는 반면 또 다른 전통에서는 그런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점이 있다. 즉 윤회에서 태어날 그러한 상태는 이전 생에서 지은 업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만일 영혼이 없고, 단지 정신적 에너지의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만이 있다면, 다음 생에서 한 사람의 동일성이 이어질 수도 없고 과거 생에서 지은 선업 또는 악업의 결과를 받는다는 것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비판은 아이덴티티의 변화라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 생애 내에서도 사람은 끊임없이 변한다. 어떤 때는 아주 극단적 변화가 올 때도 있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가. 전반적 얼굴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아도 얼굴의 주름과 색깔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변해가는 것이다. 또 우리는 그 이전의 신념을 견지하면서도 같은 강도로 현재의 신념을 견지하기도 하고, 같은 신념을 견지하지만 이전보다는 누그러뜨린 입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갠지즈 강은 매 순간 변하고, 또 수 세기 간에 걸쳐 강의 너비와 진행방향, 그리고 물의 양과 질도 계속 변해왔지만, 우리는 그것을 같은 강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이같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사람이라는 개념과 한 사람의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개념과는 서로 배치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윤회는 붓다가 원래 제창한 가르침이 아니고 힌두교의 윤회 개념에서 따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러 증거를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팔리 경전 속에 기록되어 있는 붓다의 초기 가르침 속에 윤회설은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윤회설이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붓다 이전에 쓰인 힌두 문헌을 검토해 볼 때 윤회의 가르침은 그리 널리 받아들여져 있지 않았다. 베다나 브라흐마나 속에는 이것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여러 우파니샤드에서는 그것을 말하고 있지만, 여러 사람들은 이것을 이단적인 가르침으로 비난하였다. 따라서 붓다 이전에도 윤회설이 있었지만 널리 받아들여졌던 믿음은 아니었고 정통 힌두교 가르침의 일부분은 분명 아니었다고 결론 낼 수 있다. 아마 불교의 영향에 의해서 힌두교 내에 윤회설이 더욱 강화된 것이라고 보인다. |END


*BuddhaNet에서 “윤회설(rebirth)”의 개념을 남방불교를 전공하는 세계적인 학자 두 분의 책에서 뽑아서 요약 정리한 것이다. 참고한 문헌은 다음과 같다. V.F. Gunaratna, Rebirth Explained (Kandy, 1980); K.N. Jayatilleke, Survival and Karma in the Buddhist Perspective (Kandy,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