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을 앞둔 분이 필요한 종교적 도움에 대한 불교적 관점」

[웰다잉]
「임종을 앞둔 분이 필요한 종교적 도움에 대한 불교적 관점」
The Spiritual Needs of the Dying: A Buddhist Perspective

번역자: 조은수

출전: Buddhanet: The Spiritual Needs of the Dying: A Buddhist Perspective

들어가는 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종교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불교적 측면에서 고찰하기 위해서 몇 가지 주요한 점을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의 네가지 사항이 그것이다.
첫째, 인생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소중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둘째, 죽음에 직면해서 우리만 아니라 남도 도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셋째, 죽음 후에 어떤 일이 있는지를 성찰해보아야 한다.
넷째, 불교의 마음에 대한 이론을 이해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성찰
인생의 부족함과 소중함을 이해하고 그리고 어떻게 인생을 의미있게 할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은 분명한 것이고 또한 죽음이 찾아오는 시간은 알 수 없다는 그 사실을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이것이 진리이고 사실임을 깨닫기 위해 멈추어 서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죽음이 분명히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죽음을 피할 가능성은 없다 (누구도 그래본 사람은 없다).
2) 인생은 분명하고 바꿀 수 없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으며 매순간 우리를 이 삶의 끝으로 다가가게 한다.
3) 죽음은 어느 순간 찾아오고 그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미리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있는 시간에 아주 작은 시간만을 우리의 영적 개발에 사용하고 있다).

죽음이 찾아오는 시점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다음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더 잘 분석할 수 있다.

1) 우리의 수명의 길이는 알 수 없다 –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보다 먼저 죽기도 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 보다 먼저 떠나기도 한다.
2) 죽음에 이르게 되는 여러 가지 원인과 환경이 있는데 그중 목숨을 연장하는 쪽으로 작동하는 것은 거의 없다. 실제로 우리 삶을 지탱시켜주고 편안케 해주는 것들이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음식, 집, 차 등등.
3) 우리 몸은 강하지 않고 약하기 때문에 삶은 분명치 않은 것이다. 우리 몸은 쉽게 병이나 사고로 부서진다.

이상의 몇 가지만 생각해 보아도 인생이 짧고 그러기에 소중하며, 그래서 그 어떤 부분도 놓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우리 자신에게 매일 환기시켜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자신에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이것을 가능한 한 의미 있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식으로 살 것이다.”
또는 예를 들어 우리가 살 날이 석달이나 육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 나는 이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 아직 못다 마친 일이 있는가?
- 내게 남아있는 시간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이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
- 인생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들의 순위가 변할 것인가?
- 죽음의 순간에 무엇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 아니면, 어떤 사람이 말하듯이, "매일을 마치 마지막 하루인 것처럼 산다면 너도 언젠가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죽음의 순간에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1) 세속적인 소유물, 예를 들어, 부, 명예, 또는 돈이 우리를 돕지는 못한다.
2) 친척이나 친구도 죽음을 막아주지 못하며 우리와 함께 가지 못한다.
3) 자신의 소중한 몸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한다.

즉 우리를 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단 한 가지 것은 오로지 우리의 마음상태, 우리가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얼마나 진보되어 있는지 하는 것 뿐이다.

카르마와 마음
그러면 왜 그런 것인가? 불교에서는 우리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은 모든 행위는 우리 마음에 미세한 흔적을 남긴다고 한다. 그 행위가 긍정적이냐 또는 부정적이냐에 따라 미래에 행복이나 고통으로 숙성될 포텐셜을 갖게 된다. 이러한 마음의 흔적은 숙성될 때까지 계속 남아 있거나, 아니면 영적인 수행을 통해서 정화되거나 씻겨지게 된다. 이런 과정이 바로 업의 법칙이다.

마음 그 자체는 형상도 없고, 형태도 색깔도 없으며, 남자 여자의 젠더도 없으며, 모든 현상을 알고 인식하는 능력이 있다. 마음은 기본적으로 빛나는 것이며 아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마음은 또한 여러 다른 단계의 상태가 있다.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아주 미세한 세가지 상태이다. 가장 미세한 마음은 아주 맑으며, 죽음의 순간이나 또는 아주 집중된 명상 수행 중에 느껴진다. 우리의 행위의 흔적 (karmic imprints)은 이 아주 미세한 마음 속에 저장되어 있다.

죽음, 중간단계, 그리고 윤회
죽음의 순간 몸과 마음은 일종의 해체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를 이루는 25가지의 신체-정신적 요소들은 여기서 점진적으로 녹아들어가 그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해체의 과정은 외부적인 그리고 내부적인 징후를 나타낸다. 숨이 멈춘 후 최고 3일까지 이 과정은 지속된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마음은 점점 더 미세해지고 명증해져서 마침내는 ‘죽음의 밝은 불빛’이라는 지점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때의 마음은 보통 깨어있는 상태의 마음보다 아홉 배나 더 명증하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마음은 몸으로부터 분리되고 이전의 모든 삶에서 만들어진 미세한 흔적 모두를 가지고 떠난다고 한다.

이 아주 미세한 마음 또는 의식은 미세한 바람을 타고 떠올라서 중간 상태, 바르도(Bardo)라고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바르도는 미세한 (즉 비신체적인) 몸으로서, 단단한 물체도 통과할 수 있고 어느 곳이던 생각만 하면 그곳으로 갈 수 있다. 이 중간적 상태에서 최대 7주간 머문다고 하는데 그때까지는 보통 다시 태어날 적당할 곳을 찾는다고 한다. 윤회할 장소는 업의 힘에 의해서 정해진다. 그래서 중간 상태는 소멸하고 의식은 통제를 잃은 채 윤회할 장소로 옮겨가게 된다. 이 의식은 수태 또는 그 비슷한 순간에 수정난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새로운 삶이 여기서 시작된다.

이 과정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의 순간에 어떤 마음의 상태를 지니냐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한 사람이 어떤 환경에 태어날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에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고 긍정적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면 좋은 내생이 보장된다. 그러나 마음이 분노나 또는 강한 욕망과 두려움을 느낀다면 불행하거나 낮은 단계의 윤회로 가게될 가능성이 무척 높아지는 것이다.

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은 대부분 그 사람이 평소에 습관적으로 느끼던 마음상태이다.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성격 틀 내에서 죽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면 만일 우리가 지금 우리 마음을 개발하고 그것을 조절하고, 긍정적인 원인들을 많이 심는다면,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고요하고 조절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공포를 여윌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전 인생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수행한 분들은 죽음의 시간에 후회를 하지 않는 점이 특징이라고 한다. 최근 나의 어떤 친구가 이 이야기를 듣더니, “이제 나는 기말시험 공부를 죽어라고 해야 할 때구먼”이라고 말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영적인 준비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 종교적 준비가 무엇일까를 고민해 본다면, 그 기본 원칙은 그 사람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무슨 일이든지 당신이 해도 되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영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순간의 마음상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죽음 이후 그 사람에게 닥칠 것을 결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이나 불편한 증상을 덜어주고 가족에게 위안을 주는 의사나 간호사이건, 여러 가지 감정적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상담사이건, 종교적 상담을 해주는 종교인이나 사제이건, 또는 환자의 곁을 지켜주면서 임종을 앞둔 사람과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자원봉사자이건 간에, 우리 모두는 환자가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마음상태를 얻는데 크게 기여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 원칙 하에서, 그분들을 상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분류해보면 각각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임종을 앞둔 사람이 의식이 있는가 또는 의식이 없는가.
- 의식이 있다면 그들과 같이 종교적 수행을 하거나 또는 그들 자신이 수행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 만일 의식이 없다면 그분들을 위해서 당신이 대신 수행을 해줄 수 있다.
- 특별한 종교적 신념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
- 만일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종교에서 하는 식대로 하도록 권해드리고,
-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로 하여금 긍정적 생각을 갖게 하거나 또는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긍정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종교적 믿음이 있는 분에게는 그분들로 하여금 종교적 대상물을 그분 주위에 놓아주는 것도 좋다. 예를 들어 불단이나, 염주, 자신이 따르는 종교적 스승의 사진, 또는 종교음악을 틀어주거나, 또는 향을 피운다던지 등의 무엇이든지 그분들에게 자신이 종교적 실천을 생각나게끔 하게 해주는 것이다. 또 그분들에게 자신들의 신행에 대해서 말을 하게 하거나, 그들과 같이 기도를 하는 것 등도 좋다. 의식이 없는 분이라면 기도나 만트라와 같은 것을 그분들 귀에 들려주는 것도 좋다고 한다.

그분이 종교적 신앙이 없다면, 그분에게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했던 긍정적인 것들이나 사랑이나 자비, 친절함 등의 긍정적 마음상태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임종을 앞둔 분에게 적절치 않거나 또는 원하지 않는 종교적 행위는 피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침대 끝에 서서 기도를 하는 것이 불쾌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 임종의 자리에 개종을 하려고 하여서 돌아가시는 분을 매우 화나게 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그 근본 취지는 죽음을 앞둔 분의 마음에 강한 집착이나 분노를 일으키는 종교적 물체 또는 사람을 피하자는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임종하는 분 앞에서 강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죽음의 과정이란 영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그 마음이 명증하고 미세한 상태에 있어야하는데 그것을 어지럽혀서는 안된다는 점을 우리 자신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분들이 고요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마음상태로 돌아가시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병중에 있거나 임종이 다가오는 분들을 위한 명상
병환이 심해졌으나 아직 의식이 있는 분들에게는 간단한 명상법 또는 시각적 연상법(visualization) 몇 가지가 큰 도움이 된다. 간단한 명상법이지만 아주 효과적인 것으로, 숨에 마음을 모우는 방법(awareness of the breath)이 있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호흡 속에서, 숨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움직임을 인중 위 지점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숨을 억지로 만들어내거나 과장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하면서 동시에 마음 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놓아 보내버리고, 계속 마음을 숨으로 가져와야 한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방법이지만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고 불안을 해소시켜 주는데 효과가 크다.

숨쉬기에 마음을 두는 명상법을 어떤 단어나 만트라 또는 기도를 되뇌이는 것과 겸하게 하면 그 효과는 대단하다. 그냥 “렛 고 렛 고”(다 내려놓는다는 뜻)라는 말을 들숨과 날숨에 맞춰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이완할 수 있다. 종교적 신앙이 있는 분들은 숨과 함께 기도나 만트라를 사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전에 카톨릭 수녀였던 어떤 여자 분은, "not mine, Lord, but thy will be done" (‘주여 내 뜻이 아닌 당신 뜻대로 하소서’ 라는 뜻)을 기도로 택했다. 그분은 이 말을 짧게 해서 들숨에는 “내 뜻이 아닌”을, 날숨 부분에서는 ”당신 뜻대로“ 부분을 계속 반복하여 되뇌었다.

이 명상법의 좋은 점은, 1)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있고 그리 많은 집중력을 요하지 않는다는 점 (병과 약 때문에 많은 경우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2) 마음을 진정시키고 불안을 감소시키고, 3) 그 분이 원하는 종교적 의지처를 활용하고 해주고 그것을 강화시켜준다는 점, 4) 숨 외에 다른 기구가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

하얀색 빛 “힐링” 명상법은 종교적이거나 또는 종교적이지 않은 분들 모두에게 마음에 안온함을 가져오는 좋은 방법이다. 자신의 머리 위로 커다란 흰색 밝은 빛의 덩어리를 시각화해서, 그 빛이 자신의 몸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병과 고통, 두려움, 불안을 없애주고 자신의 몸이 은혜로 충만한 치유의 힘을 가진 가벼운 에너지로 채워지는 것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그의 신앙에 따라 그 빛을 예수로 볼 수도 있고, 붓다나 또는 다른 종교적 인물로 생각할 수도 있다.또는 우주의 힐링 에너지의 원천으로 시각화해도 된다. 이 명상법은 앞에서 말한 숨챙기는 방법과 같이 잘 접목되어 사용할 수 있다. 또한 테이프에 담아 환자 곁에 두고 밤이나 낮 원하는 시간에 해볼 수 있다는 점이 있다.

임종이 가까워지면 이 빛을 내려놓고 예수의 심장이나 자신의 머리위에 앉아계신 붓다, 또는 그 무엇이든지 적합한 곳으로 내보내는 것이 좋다.

표현예술이나 부드러운 음악을 사용하는 것도 마음에 위안과 이완을 주며 죽음에 다가가면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는데 도움을 준다.

고통 중에 있는 분은 또한 고통명상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고통을 자세히 탐구 관찰하는 방법으로, 통증이 감소되거나 없어지는 경우도 많다. 이 깊은 단계의 명상법은 병이나 고통을 사용하여 자비심을 증장시키는 방법으로 쓴다.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아주 뛰어난 결과가 발생한다. “내가 이 암/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다른 사람들이 이것에서 벗어나 건강과 행복과 장수를 누리기를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질병과 고통을 사용하여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내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쓰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불행에 완전히 갇혀 있다가 열린 마음과 평화의 상태로 나아가는 경험을 한다.

이것보다 더 높은 단계의 명상법은 숨을 쉬면서 주고 받는 명상법으로 티벳불교에서 가르치는 방법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고통을 대상으로 하거나 암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식으로 한정을 가할 수도 있다, 그 방법은 검은 연기의 형태로 들숨을 모두 마시고 날숨에서 건강과 행복과 모든 긍정적인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얀 빛의 형태로 돌려보내어서 그들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것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가슴 속에 이기심의 검은 바위를 연상하고, 검은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그 연기가 검은 바위를 내리쳐서 완전히 산산조각을 내어 마음속의 이기심의 자취조차도 완전히 뿌리 뽑히는 것을 시각화한다.

이 방법은 아주 빨리 자비심을 계발할 수 있는 아주 심오한 방법이지만 이 방법을 쓸 수 있는 환자란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이 명상법을 잘 진전시키려면 두통이나 피로감 등의 작은 문제에서 시작해서 점차 더 큰 문제로 마음을 점진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결론
이상의 명상법이 지향하는 바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고요하고 행복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종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그 분에게 이익을 가져온다. 그것이 친절한 간호이건,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이던, 마사지이건, 아니면 사랑하는 가족과 같이 있게 해드리는 것이던 그 무엇이든지 말이다. 그러기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 자신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같이 임종을 맞는 분이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최대한 편안히 그리고 의미있게 옮겨가가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전이가 갖는 종교적 중요성을 잘 인식해야 한다.

이 짧은 글을 읽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분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로움이 있고, 그래서 그분들이 돌보는 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에게도 유익하기를 빈다.

이 주제에 대해 참고할 만한 문헌들을 다음과 같이 적어보았다.

<참고문헌>
Fremantle, Francesca and Chogyam Trungpa,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The Great Liberation Through Hearing in the Bardo (Boulder and London: Shambala, 1975).
(New translation) Robert A.F. Thurman,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London: Aquarian Press, 1994).
Kapleau, Philip, The Wheel of Life and Death (New York: Doubleday, 1989).
Lati Rinbochay and Jeffrey Hopkins, Death, Intermediate State and Rebirth in Tibetan Buddhism (London: Rider & Co, 1979).
Levine, Stephen, Healing Into Life and Death (New York: Anchor Press/Doubleday, 1987).
Levine, Stephen, Who Dies (New York: Anchor Press/Doubleday, 1982).
Mackenzie, Vicki, Reincarnation: The Boy Lama (Bloomsbury, London, 1988).
Mackenzie, Vicki, Reborn in the West: The Reincarnation Masters (London: Bloomsbury, 1995).
Mullin, Glenn H., Death and Dying: The Tibetan Tradition (London: Arkana, 1986).
Sogyal Rinpoche, The Tibetan Book of Living and Dying (London: Rider, 1992). |END


*호주분으로 티벳불교로 출가한 비구 펜데 호터 스님이 BuddhaNet에 기고한 글이다. 이 분은 호주 브리스배인(Brisbane)에 소재한 카루나 호스피스 센터(Karuna Hospice Center)를 창건하셨으며, 많은 글과 강연을 통해 죽음에 대한 불교인다운 종교적 태도에 대해 세계적으로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