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불교뉴스]
"불교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 만화가 데이비드 시프레스 씨와의 대화
“What’s So Funny About Buddhism?” — cartoonist David Sipress explains
저자: 데이비드 사이프레스 (DAVID SIPRESS)
번역자: 서지영
원문 게재일자: Oct 21, 2009
출전: Lion's Roar: “What’s So Funny About Buddhism?” — cartoonist David Sipress explains
그의 약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만화가 데이비드 시프레스 씨가–매거진 The New Yorker 와 Lion’s Roar 에 기고한 그의 만화를 보면 데이비드씨가 "불교를 훌륭한 농담의 원천" 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데이비드 시프레스씨는 수년간 불교를 주제로 만화를 그려왔고, 그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고 싶었습니다. 운 좋게도 데이비드씨는 우리의 관심을 기분 좋게 받아 들여 그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자, 그럼 데이비드씨, 불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재미는 언어에서 시작됩니다. "무"와 "자아" 같은 단어들을 불교의 맥락에서 서구의 맥락으로 바꿔 보면 엄청 코믹해집니다. 불교의 맥락과 서구의 맥락이라는 이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 바로 익살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그린 만화에 명상 수업에 참여중인 한 남자가 스승님께 여쭙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승님, 제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어본 ‘무(無)’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제가 그린 또 다른 만화에는 한 여성이 명상 지도자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시 피터슨입니다. 사실 ‘저’라고 할 것도 없는데 말이지요.’
병치와 부조화는 만화 유머가 통하도록 하는 유용한 재료이지요. 저는 불교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함과 모호함을 사용하기를 정말 좋아합니다. 동시에 그런 불교의 언어를 서양 대중 문화의 보다 평범한 측면과 병치시키는 것을 즐깁니다. 최근에 "깨달음에 이르는 위대한 경주”라는 TV쇼를 시청하는 두 사람을 그렸는데요. 그 만화에 나오는 아나운서의 대사는, "이번 주에 짐과 수지는 과연 마음챙김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을까요? 바브와 캔디는 자신에 대한 집요한 집착 때문에 결국에 어떻게 될까요? 계속해서 여기에 남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팀에서 쫓겨나게 될까요?
언어 외에도 역설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물론 역설은 전부 병치와 부조화에 관한 것이라서 꽤나 익살맞지요. 불교의 사상 중에서 우리가 그토록 얻고자 애쓰는 “실재”, 그 덧없는 속성에 관한 개념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똑같이 옳으면서 동시에 실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켜 줍니다. 왜냐하면 나도 상대방도 실제로는 “실재”하지 않으며 그런 “실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아이고, 이런! —이 모든 사실이 일반 서양인들을 몹시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에 불교라는 소재는 만화가에게는 비옥한 땅과 같은 거죠. 매거진 New Yorker에 연재되는 만화비유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비즈니스맨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In이라는 박스와 Out이라는 박스인데요. 저는 스님 한 분이 책상 위에 박스 하나만 달랑 가지고 있는 만화를 그렸어요. 그 박스 위에는 In과 Out을 합친 InOut이라는 라벨이 붙어있었죠.
불안감도 재미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소재 중의 하나이지요. 제가 그린 거의 모든 만화들은 어떤 형태이든 불안에 관한 것이에요. 저는 우리가 느끼는 불안감에 대해, 또 불교의 '철학'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려고 했을 때 일어나는 익살스런 오해와 전혀 불교도 같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만화를 그렸어요. 제가 그린 작품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는 어떤 남자가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요. 이 남자가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을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방법”이라고 달았어요. 그 남자 앞의에 있는 책상에는 두 번째 책이 놓여있는데요, 그 책의 제목은 “그 이후에 이 순간에 존재하는 방법”으로 붙였습니다. 매거진 New Yorker에 제가 맨 처음 발표한 만화는 명상 수업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명상 수업을 하는 교실 앞쪽에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하나 있어요.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한 여성이 손을 들고 스승님께 여쭤봅니다. “스승님, 우리는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나요?”
명상을 “올바르게”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내용과 그 명상의 과정이 직선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혼란을 겪는 만화를 몇 개 그린 적도 있습니다. 그 혼란이라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 습관적으로 생각해오던 개념조차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말하는 것이지요. 명상 수업에 참여중인 또 다른 여성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스승님, 저는 제가 어째서 명상을 할 수 없는 가 …… 그것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명상 할 수 없는 제 무능력에 대해 명상 중 입니다. 왜냐하면 명상할 수 없는 제 무능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말이 맞습니까?”
물론, 불교에서 가장 많이 논하는 주제중의 하나인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서는 불안에 대해 논할 수 없습니다. 죽음 또한 재미의 요소를 아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승사자는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등장인물인데요. 저승사자를 불교의 맥락으로 보면, 저승사자가 의미하는 윤회와 같은 “낯선” 개념에 관한 (천국이나 지옥 같은 덜 "낯선"개념들이 아니라) 유머가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한 스님이 저승사자에게 "또 당신이야?"라고 말하는 만화를 그렸지요.
마지막으로, 다른 "종교"와는 달리 불교는 그 자체를 종교로서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불교에 재미의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주제로 우스개소리를 하며 불교를 놀림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불교가 자기 자신을 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신(self)”이라는 단어를 또 쓰고 말았네요.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