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불교이슈]
최근 중국불교계에 나타난 역류현상
宣方:当代中国佛教发展中出现的逆流
저자: 宣方
번역자: 전영숙
원문 게재일자: Apr 24, 2017
출전: 当代中国佛教发展中出现的逆流
역자 설명: 선방(宣方)은 중국 절강성 제기(諸暨)에서 태어나 북경에 있는 중국인민대학(中國人民大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동 대학 철학과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불교학자이다. 본 내용은 현재 중국 남방불교를 이끄는 대표주자라 할 마힌다 존자가 남방불교적 관점에서 중국 대승불교에 대해 비판한 것을 재비판하면서, 최근 대륙에서 대승불교와 남방불교간의 불협화음을 경계하며 상호 존중의 필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마힌다 존자는 중국 광동성 출신으로 미얀마에 유학하여 파욱 토야 사야도(Pa-Auk Tawya Sayadaw)로부터 법을 전수받은 후 귀국하여 중국 내 남방불교 전파에 힘쓰는 대표적 스님이다. 이 글은 최근 중국 대륙 불교 동향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마힌다 존자의 관련 글을 확보하지 못했다. 한편 이글에 등장하는 학성(學誠) 스님은 중국불교회회장인데, ‘중국불교회 회장’이라는 자리는 대륙 불교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자리이다. 한편 제군(濟群) 스님은 최근 대륙에서 가장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젊은 스님이다. 제군스님의 블로그는 특히 대륙의 청년 불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지금 중국 대륙에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보는 근본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극단적 대승론을 지지하며 대승불교와 상좌부 소승불교는 서로 완전히 다른 불교임을 강조하면서, 완고할 정도로 남방 상좌부불교를 ‘소승’ 불교로 폄하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대승불교를 본위로 간주하는 이 같은 근본주의적 입장은 최근 중국 불교가 급성장하면서 출현한 일종의 역류현상이다. 이는 현대 중국불교의 아버지 태허대사가 제창했던 인간불교사상을 되돌려 놓으려는 기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인간불교라 함은 한전불교(漢傳佛敎), 티베트불교, 남전불교의 3대 불교 전통에 대한 존중과 평등사상을 기초로 하는 해납백천(海納百川 : 바다는 맑고 흐림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물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뜻, 역자주), 면향미래(面向未來 : 얼굴을 미래로 돌린다, 즉 과거를 따지지 않고 단합하여 함께 미래를 본다는 뜻, 역자주)의 신불교를 의미한다.
한편 중국에서 남방 상좌부불교의 세력을 확대하려는 사람들은 상좌부불교를 으뜸으로 보는 근본주의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대승불교를 배척하고 대승불교를 일컬어 허위불교, 변질불교로 폄하한다. 이에 따라 일부 사람들 중 고의적으로 한전불교의 고유 체계를 버리고 멋대로 체계를 만들기도 하고, 또 일부는 괴이한 음역 어휘를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비구(比丘)를 비고(比庫), 고타마 싯다르타의 전통 한역 어휘 ‘喬達摩(교달마:고타마)’를 ‘果德瑪(과덕마)’로, ‘阿羅漢(아라한)을 ‘阿拉漢(아랍한)’, 波羅蜜(파라밀:바라밀)을 ‘巴拉密(파랍밀)’로, 彌勒(미륵)을 ‘美德亞(미덕아)’로, ‘耶輸陀羅(야수타라:아쇼다라)’를 ‘亞壽塔拉(아수탑랍)’으로,‘提婆達多(제파달다:제바달다)’를 ‘迭瓦達答(질와달답)’으로,‘菩提伽耶(보드가야)’를 ‘布德嘎亞(포덕알아)’……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기왕에 사용하던 어휘를 억지로 생경한 것으로 바꾸어 고유의 어휘로부터 멀어지게 유도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행위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문화적으로 볼 때 중국의 이런 태도는 중국 불교의 유구한 역경 사업과 상호 인정의 태도를 계승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자 중국 불교의 역사적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사회적으로 볼 때 이는 남북 불교가 서로 융합하고 귀감이 되려는 정신을 배척하고, 이른바 자기들끼리 운영하고 자기들끼리 인정하고 자기들끼리 만족하는 남전불교를 세우고자 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또한 정치적으로 볼 때 정부에서 제창하는 것처럼 불교를 중국화 시키자는 정책과도 배치되며, 결과적으로 미래 중국 내 남방불교의 존립에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남방 불교가 이렇게 되는 것은 결코 본인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선의적 차원에서 문제점을 일깨워주고자 할 따름이다. 방금 말한 중국 내 일부 남방불교 단체의 이러한 경향이 쉽게 각종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승불교에서 최고의 근본으로 삼는 보살도 대해서 남방불교도 이를 마땅히 존중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보살도의 실천은 매우 위대한 것이기에, 결코 누구나 가볍게 해낼 수 있는 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아득한 시공간 안에서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이롭고 행복하게 하는 데에는 무량의 바라밀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테라바다의 보살도에 대해서 미얀마의 민군 사야도(Mingun Sayadaw: 1911~1993) 스님의 《남전보살도(南傳菩薩道)》, 파욱 토야 사야도(Pa-Auk Tawya Sayadaw:1934~ )스님의 《보리자량(菩提資糧)》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동시에 현대불교의 아버지 태허스님께서 찬탄해 마지않았던 진정한 남방 불교 수행자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사실 근대 한전 대승불교는 상당 기간 동안 입으로만 대승을 말했을 뿐 행동에 있어서는 얼마나 소승적이었던가!
다른 방편에서 보자면, 길은 많지만 진리는 결국 하나로 돌아갈 뿐 두 길은 없다. 진정한 불법은 하나일 뿐이다.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의 교류는 진정한 상호존중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의례적, 전략적이어서는 안 된다. 교리적 융회·관통을 각자의 진실한 마음으로 되새겨야 할 것이다. 대승불교와 상좌부 불교가 각자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만큼 상대의 아름다움을 귀하게 여기고, 서로 그 가치를 공유할 때 천하는 하나가 된다.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의 교리적 차이
이러한 입장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의 허다한 교리적 차이를 살펴보고 각자의 전통을 존중하는 동시에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상호 소통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여기 몇 가지 예를 소개한다.
1.중유(中有)
한전불교와 티베트불교는 모두 ‘중유’가 존재한다고 본다. 한전불교는 천도재를 매우 중시할 뿐 아니라 이런 의례가 전통적으로 크게 유행했는데, 이는 바로 중유이론 때문이다. 한전불교는 떠도는 ‘중유’ 즉 중음계의 영혼에게 경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는 공덕을 쌓는 것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남방 상좌부불교는 보편적으로 ‘중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상좌부 불교는 대승불교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붓다는 다만 5도윤회 내지 6도윤회만 말씀하셨을 뿐인데 만일 ‘중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도대체 어디에 해당되는 것인가? 만약 ‘중유’가 5도와 6도 중 어느 한 길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붓다의 6도 윤회설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지만 상좌부불교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면 이에 대해 북방의 대승불교는 그 결론에 승복하지 않거나 그 결론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남방 상좌부불교가 묻는 이 질문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러므로 북방의 한전불교나 티베트불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반드시 답을 해야 할 것이다.
남북 불교의 교리는 모두 선에서 출발했으며, 각자 수승한 스승으로부터 선에 대한 관점이나 점검을 받아 왔다. 또한 남북 불교의 교리는 결코 헛된 이론이나 추상적 논리에 기대어 전개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북방 불교의 ‘중유’이론은 역대 선지식의 수행과 경험을 기초로 나온 것이니 만큼 함부로 부정하거나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는 어떻게 남방의 상좌부불교와 회통하고 이들의 문제제기에 대응할 것인가? 필자에게 ‘중유’이론에 대해 한 가지를 제안해 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중유’란 6도 윤회의 교차길 사이에서 빠르게 전환 중인 상태라고 말이다. 죽은 자가 아직 한 길을 정하지 못하여 그곳에 계속 머물지 못하고 있는 상태,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 관하려고 해도 명확히 포착되지 않는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상태를 ‘중유’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2. 혜해탈의 아라한
대승경전의 《雜阿含經》 347 및 이에 상응하는 상좌부 《상응부니까야(相應部尼迦耶)》의 《須深經》에 모두 혜해탈의 아라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혜해탈 아라한은 깊은 선정에 의지하지 않고 해탈을 증득한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깊은 선정이 필요 없이 지혜를 통해서 해탈한 혜해탈 아라한이 도대체 어떤 수준의 선정의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일까? 욕계근행정(欲界近行定)일까, 아니면 사선근본정(四禪根本定)일까? 이에 대해 북방불교와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각각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구사론(俱舍論)》에서는 혜해탈 아라한은 아직 멸진정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라고 보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지나치게 고상한 담론이 아닐 수 없으며, 혜해탈 아라한의 선정 수준에 대한 요구가 지나친 것은 아닌가 싶다. 필자는 아예 혜해탈이라고 명명하며 굳이 유형을 나누고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북방 대승불교와 남방 상좌부 불교의 대덕들께서 서로 허심탄회하게 각 관점을 검토하되, 만일 원만한 합의에 이를 수 없다면 우선 최소한 상대방의 주장에 합리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결론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3. 자리와 이타
마힌다 존자(瑪欣德尊者, Ven.Mahinda:1971~ )는 남방 상좌부불교를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불교로 보는 행태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으며, 상좌부불교의 입장에서 자리와 이타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필자는 마힌다 존자의 상좌부 불교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이러한 설명에 지지를 보내지만, 한편으로 존자의 말씀 중 부분적으로 견해를 유보하고 싶거나 동의하고 싶지 않는 부분도 있다.
존자는 붓다가 말한 자리와 이타의 이익은 모두 출세간의 이익을 가리킨다고 말하지만 과연 실제로 붓다가 말한 이익이 세간의 이익을 배척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논의가 필요하다. 종합적으로 살펴본다면 굳이 이처럼 강하게 어떤 한 부분을 배척하는 관점을 가질 고수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한편, 자리(自利)를 먼저 행한 다음에 이타(利他)를 행해야 한다는 마힌다 존자의 관점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은 단지 상좌부불교만의 관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북방 대승불교도 기본적으로 이 관점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존자가 말한 바와 같이 반드시 ‘자기가 먼저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고, 확실히 알아, 증득한 후에’ 다른 사람을 지도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설사 상좌부불교에서 그러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유일한 해답인양 결론을 짓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출한다. 스스로 먼저 법을 배우고 수행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이끌라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확실히 알아 증득한 후에 비로소 다른 사람을 이끌라는 것은 과연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존자께서는 “자기도 제도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제도한다는 것인가?”라고 강력히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스스로를 제도하기 전에 먼저 남을 제도한다. 이 때문에 나는 초발심에 예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범부가 보살도를 행함에 있어 자기를 제도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을 제도한다 하였으니, 보살도의 참 의미가 여기에 있다. 대승 보살도에서는 이타를 행하려면 당연히 먼저 법익(法益)에 대해 철저히 깨달아야 하고 최소한 정견과 정사유를 기반으로 한 정행(正行)의 이익됨을 깨달아야 한다고 이른다. 그렇지만 대상승보살도가 더욱 중시하는 점은 보살도를 행할 때에 이타 속에 자리가 있고, 간절한 이타행을 통해서 스스로 정견과 정행도 한 층 진일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여러 경우에 이타와 자리는 서로 모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승작용을 한다. 만약 설령 이타와 자리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다한들 진정한 대승보살도를 행하는 자라면 주저 없이 이타를 선택할 것이다.
중국불교협회 학성(學誠) 스님이나 최근 중국 대륙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제군(濟群) 스님은 오늘날 한전불교의 수행 절차가 연결 고리상 일부 명료하지 못하거나 완전한 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공감했다. 특히 한전불교의 선 수행체계는 보통의 스님들도 상당히 어려워하는 부분이며, 이 때문에 더더욱 일반 재가불자들은 바람은 있어도 부담스러워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남방불교의 선 수행법은, 특히 초심자와 재가불자들로부터 친근하고 실제적이며 어렵지 않아 비교적 쉽게 행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요 몇 년 사이에 중국 대륙에서 남방불교 전통에 따른 선 수행법의 영향력이 나날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방 상좌부불교 선 수행법은 초심자가 자세만 단정히 하면 될 뿐 이 외에 특별히 가부좌니, 반가부좌니, 산반(散盤) 등의 특정한 좌법을 특별히 강조하지도 않는다. 또한 수행자가 단계별로 배우기 쉽게 지도 방법이도 구체적이다. 이런 점들은 한전 대승불교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이 밖에 남방불교 선법, 이 가운데 특히 파욱 사야도 계통은 아비달마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복잡한 아비달마의 명상(名相)과 참선 수행을 실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융통성 있게 하나로 융합시켰으니만큼 이런 부분은 한전불교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일부 극소수 티베트불교 영향을 받은 도량을 제외하면 한전불교는 《구사론》 등 아비달마 논과 서에 나오는 실참과 연관된 중요한 지침의 의의에 대해서 아직 그 중요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 남방불교의 일부 참선법, 특히 현대에 새롭게 나타난 지도법이 불교와 완전히 부합되는지에 대해 이론적 검토가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동중선(動中禪)과 관련된 것은 중국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더구나 남방불교의 동중선은 형식과 이론적인 면에서 중국 고유의 선종과 서로 유사한 면이 있다. 이 때문에 지금 중국 대륙에서 남방의 동중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중선 수행을 통해서 근원적 선정을 얻을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쓴 것은 현재 중국 불교가 당면한 문제를 감히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여 제방의 대덕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갖는 동시에 이 기회에 남방불교와 북방불교가 더 밀접히 상호교류하면서 서로가 더 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