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카디타 포럼 – 제14차 불교학과 여성학의 만남 – 학문과 삶의 여정을 돌아보며 – 발표: 리영자, 정리: 전영숙


제14차 포럼

불교학과 여성학의 만남
– 학문과 삶의 여정을 돌아보며
발표자: 리영자
일시: 2021년 9월 30일
장소: 전국비구니회관/온라인

발표: 리영자(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샤카디타 코리아 고문)
정리: 전영숙(샤카디타 코리아 운영위원)

코로나19 상황 탓에 그간 샤카디타 코리아 포럼을 비대면으로 진행해 왔다. 하지만 이번 포럼은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만큼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이에 샤카디타 코리아 공동대표이신 본각스님과 비구니회관 여러 스님들의 배려로 9월 30일 목요일 비구니회관에서 대면과 비대면 혼용으로 포럼을 진행하였다. 오랜만에 대면 모임을 가지니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았고, 또 직장 근무 등으로 바쁜 분들을 위하여 점심시간에 줌으로 간편하게 참가할 수 있도록 하여 여러 사람이 함께할 수 있어 좋았다. 비구니회관에서 맛있는 점심공양과 다과까지 베풀어주셔서 모처럼 행복하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리영자 교수님 약력

여성으로 태어난 인연 때문일까? 여성학에 대해서 불교계 누구도 관심 갖지 않던 70년대, 일찌감치 선생님은 불교와 여성학의 교차점에 주목하고 불교의 양성평등관을 교육과 연구를 통해 밝히셨다. 한국 불교학계의 1세대 학자이자 천태사상 연구에 큰 기여를 하신 분으로서, 불교여성학자로서, 교육계 리더로서 평생 많은 일을 해오셨기에 그 업적을 다 언급하자면 간단한 일이 아니기에 그 가운데 굵직한 몇 가지만 간단히 소개한다. 

선생님은 동국대 불교학 학사, 석사, 일본 다이쇼오(大正)대학 문학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장, 불교대학원장, 하버드대 객원교수, 한국여성학회 회장, 법화학천태학연구회 회장, 한국불교연구원장 등을 역임하셨으며,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 샤카디타 코리아 고문이시다. 대표저서로 『한국천태사상의 전개』, 『불교와 여성』, 『법화천태사상연구』, 『천태불교학』 등이 있고, 역서로 『보살의 인생독본』, 『천태사교의』, 『일본불교』, 『선종사상사』, 『일본불교사』, 『천태법화의 사상』, 『초보자를 위한 선』, 『호산록』 등이 있다.

사회계몽의 여성 주역이 되기를 다짐하던 강릉 소녀

선생님께서는 1936년 강릉에서 출생하셨다. 독자인 아버지와 결혼한 선생님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낳고 세 번째로 딸인 선생님을 낳으셨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싶은 마음에 첫 아들을 잉태했을 때에는 열 달 동안을 한 번도 빠짐없이 오른쪽으로 누워 주무셨다고 한다. 당시에 그렇게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산부가 몸이 무거워오면 사방이 답답하고 힘들어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이미 두 아들이 있으니만큼 셋째로 딸이 태어난 것을 행복해 할 수도 있으련만 선생님의 어머니께서는 삼칠일 동안을 줄곧 분해서 우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선생님은 오히려 그런 어머니가 불쌍해서 덩달아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여성으로 태어나리라.’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여성으로서의 강한 주체의식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을까? 

 딸이라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의 염려와 달리 소녀시절 선생님은 의협심 있고 당당한 아이였던 것 같다. 선생님은 특히 이광수의 소설 『흙』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장래에 주인공 허숭과 같은 변호사가 되어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고자 다짐하곤 했다는 것이다. 허숭은 남자의 몸으로 그런 일을 해냈지만 여성으로서 허숭처럼 일을 해낸다면 더욱 멋지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것이다. 강릉여중 시절 웅변대회에 나가서도 당시 부녀국장 박승호가 쓴 「여성의 진로」라는 글을 주제로 택하였다고 한다. 여성으로서의 강한 주체의식이 여기서도 돋보인다.

 그러나 선생님의 당차고 원대한 꿈은 아버지의 반대로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소위 스카이대학 법학과에 합격했음에도, 아버지는 여자란 모름지기 중학교 정도만 나오면 충분하다며 딸의 대학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녀의 꿈은 한 순간에 무너졌고 마음은 쪼그라졌다. 온 우주가 앞을 막는 것 같은 어둠을 느꼈다고 한다. 

서울생활, 우연한 불교와의 인연이 불교학 연구로 이어지고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의 삶에도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당시 명문대 출신도 부러워하던 한국은행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좋은 직장이니만큼 월급도 높아 경제적 여유가 생기니 마음도 여유로워졌다. 그러던 차에 선생님은 우연히 ‘육이오 후에 방황하는 젊은이를 위한 대사상강연회’라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았다고 한다. 퇴근 후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선생님은 친구와 함께 강연회에 가보기로 했다. 당시 이 강연회에는 황산덕, 김기석, 이종익 박사 등 내노라하는 불교 지식인들이 강의를 맡았다. 실존철학 강의가 많았는데, 선생님은 막연히 이런 강의들이 좋았다고 한다. 전쟁 후 피폐해진 사람들은 모두 삶에 지쳐있었고,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아내느라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떠올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시대였다. 선생님은 그곳에서 사르트르, 까뮈 등의 이름을 들으며 이들의 작품을 거듭 읽었다. 그런데 이 중 알베르 까뮈(1913~1960)의 『이방인』에 유독 애착이 갔다. 주인공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르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장면을 읽으며, ‘대체 이게 뭘까?’라는 의문이 강하게 떠올랐다고 한다. 선생님 나름의 화두가 생겼던 셈이다. 그때 이종익 선생님의 강의로 불교를 알게 되면서 선생님은 이것이 바로 ‘업’임을 깨닫게 되셨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강의가 실존철학 관련 강의였지만, 이종익 박사와 신소천 스님은 불교관련 강의를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특히 신소천 스님의 『금강경』 강의는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강의였다고 회고하셨다. 신소천 스님은 원래 기독교 전도사를 하시다가 우연히 『금강경』을 읽고 발심하여 불교로 개종한 분이셨다. 스님의 강의는 이론이 많지 않고 조용조용히 차분하게 설명을 잘해주셨다. 어느 날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니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로다’라는 구절에 이르자 마치 선생님의 마음에 비수가 꽂히듯 이 말씀이 꽂혔다고 한다. 또한 특히 ‘범소유상 개시허망’은 당시 폐허가 된 서울모습과 기가 막히게 잘 오버랩 되었다고도 하셨다. 예를 들면 그 당시 폭격으로 한국은행 본관은 뼈다귀만 남아 있었고 중앙우체국은 벽돌집만 덩그러니 있었으며, 중앙청 건물도 뼈다귀뿐이었다고 한다. 그토록 멋진 건물도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된 것을 보며 ‘이거야 말로 진리구나!’ 하고 느꼈던 것이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불교에 관심조차 없었고 여성 불자들은 쌀을 이고 절에 가서 복을 비는 정도의 신앙활동에 그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이처럼 훌륭한 대강연회가 열리자 직장을 구하기 위해 국립도서관을 오가며 공부하던 젊은이들이 다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비록 이들 중 대부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났지만 선생님은 이상하게 불교가 마냥 좋아서 활동을 계속하셨다. 심지어 강연을 들으러 갔다가 당시로서는 귀하디귀한 값비싼 하이힐도 몇 번 잃어버렸지만 선생님은 그런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으셨고, 신고 돌아올 신발이 한 켤레도 남아있지 않아서 맨발로 집에 가도 아무렇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런 선생님이다 보니 당시 서울에서 재가여성불자 모임의 리더들, 특히 대법선 보살 등 여러 보살들이 선생님을 무척 아끼셨다. 대법선 보살은 선생님과 몇몇 청년들에게 동국대 불교학과 입학을 주선해주셨고 백성욱 박사가 장학금을 만들어 공부할 기회를 주었다.

선생님은 마치 옅은 안개 속에서도 사물의 윤곽은 다 드러나 보이는 것처럼 넓은 세상 속에서 부처님의 사랑과 자비의 편재를 뚜렷이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본격적으로 불교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불교라는 학문에 나날이 재미가 느껴졌다. 하루는 모 불교학 교수가 불교공부는 장판 때가 묻어야 알아지는 것이지 그냥 학점만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충고해 주셨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불교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셨다. 이처럼 용감한 행동에 그 동안 늘 선생님을 응원하고 격려하던 대법선 보살조차 그 좋은 직장에 왜 사표를 썼냐며 나무랐지만 선생님은 후회하지 않았고, 이제야 말로 불교 공부를 장판 때가 묻을 때까지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결국 남들보다 빨리 석사논문을 써내고 고마자와 대학에서 공부하던 한국 유학생의 소개로 일본 다이쇼 대학으로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남자 불교학자들도 여성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는데 마침 다이쇼대학의 세끼구찌 신다이 교수가 선생님의 석사논문을 읽어보고는 제자로 받아주었다. 세끼구찌 신다이 교수에게는 동경대를 나와서 독일 유학을 떠난 총명한 딸이 있었다고 하니 이러한 영향도 작용했으리라. 삶의 고비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선생님은 길이 끊어진 듯한 찰나 어느새 다음 길이 열리는 놀랍고 감사한 경험을 많이 했다고 하신다. 일체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하니 남들은 끊어졌다고 포기할 수도 있는 길을 선생님은 이어진 길로 보아내는 안목이 있었기에 고비마다 새 길이 나타나 주었던 것은 아닐지?

불교학과 여성학의 교차점을 찾아 불교여성학의 길을 열다

동국대학에서 전임강사로 임용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여학생 관리를 맡게 되셨다. 당시 한국의 남학생에게는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어서 이 시간에 모든 남자 대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남학생이 교련 수업을 하는 동안 여학생들은 쉬고 있었는데, 차라리 그 시간에 여성학 강의를 진행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여자교수들이 뜻을 모아 교재도 만들었다. 당시 숙명여대가 여성학 강좌를 개설하고 있었고 이화여대도 이와 유사한 강좌를 막 개설하던 시점이었으니 동국대학교 여성학 강의는 시기적으로 매우 빨랐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불교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여성학 강의를 진행했으니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서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화여대에서 ‘한국여성학회’라는 학회를 만들었다. 제1회 학회 세미나 주제를 정하는 과정에서 당시 이대 총장 등 여러 여자교수들이 종교와 관련된 주제를 잡자고 제한하였고, 선생님이 이분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들이 비록 기독교를 믿는다고는 해도 불교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학회 세미나에는 이삼백여 명의 참석자들이 빽빽이 자리를 채울 만큼 성황리에 대회가 진행되었는데, 선생님이 불교의 성평등에 대해서 발표하자 가장 많은 관심과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특히 비구니 팔경계에 대해서 학문적 근거를 들어 그것의 근거 없음을 강하게 주장하셨을 뿐 아니라,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평등하고 차별 없는 이론을 가졌음을 밝혀 청중들로부터 폭발적인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부처님 재세 시 비구니 출가는 있었지만 비구니교단은 미처 형성되지 못한 시점이었기에 부처님이 팔경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아울러 공성을 중시하는 불교는 칠거지악을 논하는 유교나 아담의 갈비뼈 운운하는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완전한 평등의 종교임을 천명하였다. 

이날 선생님의 발표는 많은 타종교 학자들의 인정과 호응을 받았고 특히 선생님의 발표를 눈여겨 본 강원룡 목사는 그 후 선생님을 아카데미하우스에 초청하여 수차례 강좌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비구니 팔경계설의 허구성에 대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린 결과 수업에 참여했던 비구니스님들께도 자각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대승불교 경전이든 초기 교단의 빠알리어 경전이든 여성도 수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는 불교와 같은 평등한 종교는 이 지구상에 없다. 카톨릭의 수녀를 자세히 살펴보라. 수녀는 신부를 돕는 역할만 할 뿐 성직자 자격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라!

한편 선생님은 궁극적으로 볼 때 불교는 사부대중이 합심해야 하는 종교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사부대중의 화합이 없으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비구니 출가자가 줄어들어 걱정들을 하지만 비구니스님에게 대우를 제대로 해주면 왜 출가자가 줄겠냐는 반문도 하셨다. 우수한 비구니 인재에게 기회를 줄 때 한국 불교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학에게 당부할 말씀을 청하는 질문에 대하여

이날 포럼에는 미국 인디애나주 드포대학 김수정 교수가 참석하여 후배 여성불교학자에게 당부할 말씀이 있는지를 여쭈었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이미 20년 전에 퇴직한 사람으로 젊은 세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꼰대 짓이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지금 세상은, 당신이 살았던 여성으로서의 열등감을 느꼈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졌으니만큼 새삼 남녀평등을 논할 시대는 아니라고 하셨다. 또 여성할당제 등 여성에게 좋은 여건이 많이 주어지는 데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노력을 너무 안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말씀도 하셨다. 아울러 여성들이 더 분발해야 한다, 여성이 제 역할 못하고 정치적으로도 중립을 지키지 못하니 무시당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남녀평등을 하려면 여성들이 분발하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도 강조하셨다. 지금은 이미 남녀문제는 지나간 문제로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여성이 발전하려면 중중무진의 연기의 세계를 밝히는 화엄적 사고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선생님이 살아오신 시대에 대해서 더 많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선생님과 다시 만나 못다 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